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마다 검정 슬랙스에 운동화를 신고 나풀나풀 걸어가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그녀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봄을 알려 주기 위해 꽃이 필 준비를 다 마쳤는데 보아주어야 할 그녀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아픈 것인가? 며칠 전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지나가더니 감기에 걸렸나? 끝나지 않은 겨울바람이 그녀를 괴롭히는가?
나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101동 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출근하는 7시 35분은 이미 지났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나는 목필(木筆)이다. 내가 꽃봉오리를 피우려고 할 때 끝이 북쪽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화’라고도 했다.
그렇다. 나는 겨울을 끝내는 목련이다. 봄이 오기 전 겨울의 끝자락에 나는 푸릇푸릇 잎보다 하얀 속살을 먼저 드러낸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다. 백색 꽃잎 속에 숨겨져 있는 연한 홍색의 기부는 쑥스러움이 많은 내가 볼을 붉힐 때마다 더 짙어진다. 아마 사람들은 나의 속살까지 관심이 없어 내가 부끄러움이 많은 지도 모르는 듯하다.
지난겨울, 갑자기 무릎이 아파 제대로 서지도 못해 허리를 굽히고 있어야 했다. 여기로 옮겨져 온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겼고 예전만 못한 것은 당연했다. 1995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휑한 정원을 위해 사람들은 나를 심었다. 그전까지 나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다.
처음 만난 나의 주인은 손이 아주 작은 꼬마 숙녀였다. 꼬마가 태어나던 해 나를 심었고 꼬마가 어른이 될 때까지 함께했다. 두 번째는 술만 먹으면 나를 꺾는 주인이었다. 그때 상처가 아직도 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로 옮겨온 후로는 따분한 시간을 보냈다. 여기 아파트는 젊은이들보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많았다. 아무튼 나는 재미가 없어 늘 하품을 하며 지냈다. 간혹 동백이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동백이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기에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가끔은 자기 색만을 고집하며 내게 상처 주기도 했다. 꽃잎이 하얀 내가 없어 보인 다나 머라나. 그 후로 동백이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는 어느 날 2014년, 봄이었다. 어긋나게 달리기 시작한 잎이 뻗어 나가고 있었으니, 아마 4월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101동으로 이사를 왔다. 언니와 동생, 엄마, 그녀의 가족은 단란했다. 차에서 내리며 툭 던진 웃음이 내게 와 콱 박혔다. 전날 비가와 나는 촉촉했고, 바람은 따듯했고, 태양은 뜨거웠다. 그렇게 나는 그녀라는 세상을 만났다.
이사 온 다음 날부터 그녀는 팔랑팔랑 하얀 운동화를 신고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쩌다 그녀가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지나갈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날 그녀는 바람을 닮은 향을 풍겼다. 아마도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했다.
달이 시퍼런 늦은 밤, 술이 취해 내 앞을 지나가기도 했다. 달콤한 알코올이 내 코를 적실 때 나도 같이 취해버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가방을 털레털레 흔들면서 가는 날도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삐죽 내민 입술사이로 한숨이 피식 묻어나왔다. 위로해 주고 싶어 손끝을 뻗었는데 그녀는 보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가곤 했다.
그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준 것은 그 다음 해 봄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나의 그녀가 보내는 미소에 내 심장이 울컥 피를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움찔움찔 꽃을 피우기 위해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녀가 내 앞에 섰다. ‘어어- 꽃이 피려나 보네. 네가 목련이었구나! 난 몰랐네.' 그녀는 내가 목련인지 몰랐던 것 같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앗, 늦었네.'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뛰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한참을 쳐다봤었다. 그 순간은 꽃을 피우기 위한 나의 몸부림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늘, 새벽부터 그녀가 걸어오는 길을 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녀가 지나쳐 가버릴까 눈이 시큰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와라. 제발.' 나의 외침이 공기 중에 사라질 때쯤이었다. 그녀가 보였다. 하얀 운동화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음음, 큼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에게 내 마지막 꽃을 보여주어야 했기에 한껏 멋을 부렸다.
10초, 5초, 1초 전. 움찔움찔 거리던 꽃잎을 사르르 피어내었다. 하얀 나를 그녀가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 폈네. 그제는 안 보이더니. 너를 보니 봄이구나! 고마워. 봄 알려줘서.' 손 흔들며 그녀는 출근길을 재촉했다. '그래 되었다. 이렇게 그녀의 미소를 보았으니, 되었다.' 이젠 떠나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_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