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나를 칭찬해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어릴 적에 유난히 겸손을 강조하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어떤 일을 잘했을 때에도 진심 어린 칭찬보다는 '교만해서는 안 돼.', '자만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어.', '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어쩌다 학교에서 발명 경진대회에 나가 상장을 받아 왔을 때에도, 학원에서 1등을 하여 선생님으로부터 커다란 곰인형을 선물로 받아왔을 때에도 부모님은 칭찬에 이어 꼭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그렇다고 너무 교만하지 말아라. 잘난척하면 미움받는다."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나에 대해 기대가 적어지고, 받은 칭찬에 대해서도 굳이 손사래까지 쳐가면서 사양하곤 했다. 남의 업적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으나 내가 이룬 성과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색했다. 그러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내가 앞 문장에서 '-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이제는 나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상황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멈추겠다는 내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사실, 겸손한 태도와 비관적 태도는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겸손한 태도는 내게 있는 부족한 면을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이다. 어려움을 만날 때는 탐구하는 마음과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으로 자료를 찾거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며 하나둘씩 답을 찾아 나가는 진취적인 모습이다. 반대로 비관적인 태도는 '내가 뭐를 할 수 있겠어?'라는 힘 빠지는 자기 비하를 시작으로, 명확하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덮어놓고 '잘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예측하는 태도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자기 확신은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주저하게 만들고, 포기는 되도록 빨리하도록 조장한다.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나는 못할 거야.' '이번에는 그런대로 좋다고 해도 나중에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혹은 '내가 뭘 하겠어...'라는 마음가짐은 나의 성장에 그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과는 지양하되, 나는 장점과 강점이 많기에 그것을 잘 발휘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상보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라고 믿어주면서 말이다.
얼마 전에는 230페이지 가까이 되는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26페이지로 축약하여 교육학 분야의 명망 있는 학술지에 투고를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요약하여 학술지에 싣는다는 것은 내가 신진 학자로서 여러 선배 학자들께 논문으로 인사를 하는 신고식이라고 볼 수 있다. 논문을 투고한 지 한 달 정도 된 어느 날, 학회로부터 드디어 심사 결과를 받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심사 결과 메일을 받았는데, 난 메일 제목만 바라볼 뿐, 한동안 내용을 확인 보지 못했다. 어쩐지 까다로운 심사위원 세명으로부터 논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가득 쓰여있는 심사 결과서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나를 압도했다. 몇 년 전 다른 논문을 심사받으며 신랄한 비평이 담긴 심사평을 받았던 쓰라린 경험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심사위원의 글씨체에서조차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다른 논문인데도 내 마음은 이미 부정적인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메일 제목을 바라만 보다가 마음을 먹고 숨 한번 크게 쉬고, '심사 결과지 1'을 클릭하여 열어보았다. 의외로 심사평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 뭐지?'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맞아, 원래 심사위원 중 한 명은 격려차 조금 좋게 써주는 편이지.'였다. 그리고 '심사 결과지 2'를 클릭하여 열자, 이번에는 심사평이 더 좋게 나왔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심사 결과를 의심을 했다. 마지막으로, '심사 결과지 3'을 열자 이번에도 심사평이 아주 좋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수정 요구사항이 있긴 했다. 그러나 세 분의 심사위원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논문이 논리적으로 잘 전개되었으며, 분석 틀은 매우 탁월하고, 시의적절한, 사회에 매우 필요한 논문이다'라는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호평을 받았다. 수정 요구에 따라 논문을 수정한 후, 다시 심사를 받을 필요는 없고 바로 학술지에 게재가 가능하다는 '수정 후 게재가'라는 결과였다. 기분 좋아 펄펄 뛰고 싶은 심정으로, 성과를 자축하기 위해 밤 11시가 다 된 시간에 치킨과 감자튀김과 콜라를 주문했다. 온 가족과 치킨을 나눠 먹으면서 '그래. 나도 이렇게 논문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며 마음껏 나를 인정해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치킨은 무슨 치킨. 그냥 운이 조금 좋았던 것이라며 희미한 미소를 한번 짓고 조용히 넘어갔을 것이다. 성과에 대해 무척 기뻐하는 내 모습이 남에게 교만해 보일까 염려하며, 들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 훨씬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좋은 성과는 마음껏 즐거워하려 한다. 그동안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흐릿해지는 눈을 비비면서 논문을 썼던 나에게 무조건적 칭찬을 해주고 싶다. 혹시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하면서도 표시를 하지 않아 '표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연구 부정이라도 저지르면 큰일이기에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돌려보며 확인, 또 확인하여 표절률 0%에 도전하던 나의 집념과 성실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수 없는 수정을 거쳐 독창적인 논문을 쓴 나에게 '너 그렇게 자만하다간 큰코다친다.'라는 기운 빠지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해주고 싶지 않다.
가장 진정한 의미의 칭찬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스스로에게 받는 것이 아닐까? 나의 노력과 수고를 시시콜콜하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잘했다고 칭찬 한번 해주고, 환하게 거울 보고 웃어주고, 상도 주고 나면 또 새로운 일을 시도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어느덧 한참을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만큼 가슴 벅찬 발견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제, 남들에게만 '좋아요'를 눌러주지 말고 나 자신에게도 '좋아요!' 버튼 한번 꾹 눌러주자. 충분히 그래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