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사람들 26화
"동생아, 안 좋은 소식이 있다."
각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셋을 둔 E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애들 방학이야."
"헉."
"너네 집 놀러 가도 돼?"
"지금?"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현관에서부터 우르르쾅쾅하며 말미잘 삼 형제가 집에 몰아닥쳤다. 삼 형제 뒤로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야! 뛰지 마! 이런 말미잘! 여기 21층이야!" (E는 말미잘, 연금술사와 말미잘 편의 주인공 엄마)
한때 가녀린 목소리의 E가 마침내 득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다. 나는 차마 애들보다 '너'님이 더 시끄럽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죽을 수도 있기에...
친정에 온 E는 꺼질 듯 풀썩 소파에 널브러져
방학으로 인해 피폐해진 자신의 삶과
아들 셋의 세끼와 간식 메뉴에 관한 고뇌,
방학 첫날 아수라장으로 변한 집에 대한 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실, 더 안 좋은 소식도 있다."
"방학보다 더?"
"정말, 무시무시한 거야. 끔찍하고. 생각하기조차 두렵고..."
"무섭게 왜 이래."
"400만 원."
"뭐?"
"치과 치료비."
E는 바쁜 일상에 미뤄왔던 세 형제의 치과검진을 방학 때 한 큐에 끝내기로 결심하고
초등학교 막둥이까지 겨우 설득해 치과로 데려갔을 때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치과 치료비 400만 원.
간호사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지만. E는 갑자기 가계에 몰아닥친 금융 쇼크에 여름휴가 계획을 전폭 수정해야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2주뿐인 짧은 여름방학을 치과에서 보내게 되었다고 툴툴거렸고, E 또한 휴가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그때부터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방학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고, E는 휴가 내내 치과에 출근 도장 찍으며 점점 더 예민해졌다.
치과는 아침부터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유독 그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다가가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대화 내용은 대부분 병원 진료와 관련이 없는 TMI였다.
E는 아이들이 치료할 동안 틈만 나면 이런저런 말을 시키는 간호사의 오지랖이 거슬렸다.
'완전 투머치토커잖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 생각 안 하냐? 제발 나 내버려 두고 일이나 하시라고요.'
뾰족해진 속마음에 E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애써 간호사를 외면했다.
그런데도 그 간호사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E는 스스로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간호사는 귀가 안 들리는 노인을 생각해 큰 소리로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건넸다.
"어르신, 임플란트 총비용이 250만 원이에요. 나라에서는 2개까지 지원이 되는데 그거로는 다 지원되는 건 아니고요. 잇몸이 안 좋으셔서. 부가적인 비용이 또 있어요..."
"뭐? 얼마?"
"250만 원이에요."
"25만 원? 비싸!"
"아니요. 250만 원."
"으헥?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싸게 해 줘! 아님 여기 말고 다른 병원 갈 거야.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노인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어르신, 못 믿으시겠으면 더 알아보고 오셔도 돼요. 자녀분들이랑 상의하시고 연락 주세요."
"아휴, 그냥 깎아줘. 동네에서 싸게 해야지. 반값에 해줘."
노인은
돈이 없다며 막무가내로 잡아떼다가
자식들 볼 면목이 없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매달리고
동네 사람들한테 바가지 씌운다고 동네방네 소문낸다고 협박을 하다가
제발 깎아달라며 두 손을 모아 사정사정했다.
거의 20분 동안 같이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노인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실랑이를 견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냐.'
평소에 데면데면하던 간호사였지만 사람한테 해야 할 게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게 있지 병원 직원이라는 이유로 무례한 일을 혼자 감내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의사는 뭐 하고 있냐? E는 방관자가 되길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간호사의 얼굴엔 힘들고 지친 기색이 없었다.
"어르신, 그러실 수 있죠. 임플란트가 비싸요. 깎아드릴 수 있으면 좋은데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맞춰드린 거라서요. 다른 병원 가셔서 알아보셔도 돼요.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괜찮아요."
그 간호사는 노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졌는지 노인은 분노가 점점 잦아들었다. 아무 말이나 떠드는 수다쟁이인 줄 알았던 그 간호사의 사람을 향한 관심이 가짜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몸이 아픈 환자가 마음까지 다치지 않도록 소중하게 돌봐주는 좋은 사람.
그러고 보니 E에게 건넨 말도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니었다.
"애들 방학이라 힘드셔서 어떡해요."
"휴가는 따로 안 가세요?"
"치료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제가 다 속상하네요."
"힘드시죠. 저희 애들도 사춘기 때 그랬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다 엄마 생각해요."
그 후, E는 치과에 가면 그 간호사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말 걸어주길 바라는 광팬이 되었다고 했다.
"참 대단하지. 애들 진료하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져. 치과 상담 선생님이 아니라 심리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온 것 같아. 나 진짜 그 간호사 선생님을 존경해.
요즘 그런 말 하잖아.
의사는 AI로 대체해도 간호사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그 선생님을 보면 정말 그럴 것 같아.
아무리 뛰어난 AI 간호사 로봇이라도 그 사람의 진심을 학습할 수는 없을 거야.
인간의 진심이 가진 마성의 매력이랄까
나 간호사 선생님 만나고 싶어서 치과치료가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