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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r 15. 2024

수강생 상시 모집?!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1)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 부는 아침 바람은 이제 서늘한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최현욱은 어깨에 걸치고 나왔던 니트 스웨터를 겹쳐 입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어차피 원두만 사서 작업실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Espressive-C라고 앙증맞게 쓰인 나무 문패 밑으로 OPEN 사인이 보였다.


“오셨네요?”


오픈을 앞두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진태하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최현욱을 보며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차림새로 그를 맞이하는 진태하를 보며 최현욱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 사장님은 언제든 부르면 바로 런웨이 올라가실 수 있을 것 같으시네요.”

“아,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이왕이면 탑모델 클라쓰 바리스타가 내놓는 한 잔이 더 맛있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그러네요. 참, 원두가 다 떨어져서요.”

“오케이, 금세 챙겨드릴게요. 그런데 왜 계속 꼬박꼬박 존대하세요, 형님. 거리감 느껴지게.”


능청을 떨며 아래턱을 슬쩍 매만지던 진태하가 연극적으로 아아, 하며 카운터 옆 선반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제가 성격이 좀 그래서… 차츰 편하게 말할게요.”


진태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포스기 옆에 놓아둔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현욱이 서둘러 사양부터 했다.


“아니, 괜찮아요. 판매하셔야죠, 이렇게 매번 퍼주시면…”


진태하가 눈썹을 찡그리며 검지를 세워 얼굴 옆으로 흔들며 훈계하듯 말했다.


“노노, 그거 아니에요. 형님은 매번 드시는 것만 드시잖아. 사람이 좀 다양한 문물도 접해보고 그래야 작품 영역도, 그 뭐냐. 아무튼, 넓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형님은 세상에 무슨 커피가 예가체프만 있는 줄 아셔. 또 알아요? 이거 의외로 괜찮네, 하면서 다른 원두도 같이 사가시게 될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뭐겠어요?”


단 한 번도 끊김 없이 유창하게 쏟아지는 진태하의 말을 듣던 최현욱은 무어라 대답할 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 금세 머쓱하게 웃고 카드를 내밀었다. 진태하가 계산하는 동안 그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 그리고 그 건물 너머로 보이는 푸른 물결에 차례로 가 닿았다. 평범한 간판에 새겨진 [공방, 숨]이라는 이름이 오늘따라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두와 샘플 드립백이 가득 든 봉투를 받아 안은 최현욱이 익숙한 풍경 소리를 뒤로 하고 길을 건넜다.


끼이익.

무게가 제법 나가는 문을 밀고 들어가니 어둑한 실내 곳곳을 채운 그의 작품들이, 혹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소망들이 각자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어색하지 않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나갔다.

모든 것이 그가 놓아둔 그대로였으나 낯선 사물이 하나 있었다. 작업실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다소곳이 그를 기다리는 서류 봉투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기억 하나가 밀물에 떠밀려오듯 의식 위로 되살아났다.


- 선생님, 이거 제가 만들어봤는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어제 공방 문을 닫기 직전 진태하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로미가 퇴근길인지 사복 차림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한 최현욱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이로미는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서류 봉투를 내려놓은 뒤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약속이 있어서 지금 좀 빨리 가봐야 하거든요! 내일 다시 설명드릴 테니까 일단 선생님이 한 번 봐 보세요!


최현욱이 얼른 봉투를 열었다. 출근한 이로미가 들이닥쳐서 어떠셨어요, 하고 눈을 빛내기 전에 한 번이라도 봐둬야만 했다. 그도 작업 중이어서 미처 못 봤다는 사실은, 이로미에게는 핑계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였으니까.

봉투를 열고 문서를 끌어올리자마자 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설마 하니 가벼운 술자리에서 나왔던 말이 이렇게 코앞의 현실로 닥쳐올 줄이야. 매끄러운 미색 A4용지에 종이가 허락하는 최대포인트로 박혀있는 글자는,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공방, 숨]클래스 오픈! 수강생 상시 모집>


‘맙소사.’


떨리는 동공에 호응하여 최현욱의 손끝이 떨려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당혹스러움이 물러가기도 전에 거의 망각의 넘이까지 갔던 기억 하나가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러니까 대략 나흘 전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시작한 것인지는 몰라도 방문객 비친화적인 언덕바지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이들끼리의 친목을 다지자며 달에 한 번 정도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주량도 약한 주제에 술은 좋아하는 이로미가 살짝 혀가 풀린 상태로 말을 꺼낸 것이 이 사달의 원인이었다.


“선생님이 만드신 인형들 지인짜아아아 예쁜데에.”


취기가 오르면 말꼬리가 늘어지는 것이 이로미의 버릇이었다. 진태하가 쯧, 혀를 차며 이로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소주잔을 빼앗았다.


“꼬맹이 주제에.”

“꼬맹이라고 하지마여어! 꼰대 주제에.”


취기를 빌어 과감하게 맹랑해진 이로미를 어처구니없이 보던 진태하가 미간을 구겼다. 퇴근 후의 가벼운 모임이니 조금쯤 풀어져도 좋을 텐데 그는 어김없이 칼같이 깃을 세운 셔츠에 블레이저 차림이었다.


“보세요, 형님 누님들. 제가 이런 애를 데리고 일을 합니다.”

“귀여워서 활력소 되겠는데 뭘. 그런데 로미가 현욱 씨 작품을 많이 좋아하나 보네.”


포피 동물병원장 이윤도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하자 여간해서는 말이 없는 히요코 식당 주인인 에이미가 모처럼 동조하고 나섰다.


“누구든 안 좋아할 수 없겠던데요? 저는 도자기 인형이 그렇게 예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어요. 최현욱 사장님 손재주가 정말 좋으신가 봐요.”

“에이, 아니에요.” 


최현욱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긴 뭘 아니에요. 겸손도 정도껏 하셔야지. 에이미 사장님 모르셨죠? 최사장님 원래 미국에서 바이올린 전공하셨잖아요. 딱 보면 외모부터가 한 예술하게 생기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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