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지께

by 로사 권민희

겨울 햇살은 오아시스 같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오후입니다.

아버지,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막내딸 꼼지예요. 어제도 전화로 아버지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렇게 또 편지를 쓰려니 막상 할 말이 없다 싶기도 해요. 아침 기도를 하면서 오늘은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몇 차례 마음이 일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이번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거죠. 아버지가 보내주신 농산물을 먹어서일 거예요.

요즘 저는 참 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봄날, 아니 수확의 계절 가을 같다는 느낌 속에 있어요. 물질이 주는 위안이 아니라 마음이 풍요로운 그런 느낌, 아버지도 농산물을 수확하시면서 그런 느낌 속에 있었겠지요? 함께 할 수 있어 기뻐요.

지난 5월 둥근 마 파종 직전에 일어난 아버지의 교통사고를 통해 저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순간들 속에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고 지내보니 장기 입원과 수술은 오히려 온 가족이 마음을 모으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계기로 돌아봐져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기도를 해온 스스로가 고맙더라고요.

그때 만났던 감정은 우선 과거에 쌓여 있던 미움과 원망, 혼란스러움이었어요. 아버지는 무기력하고 의지가 약한 존재라는 무의식이 건드려졌어요. 자주 술에 취해 자신을 해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저에게는 삶보다는 죽음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저의 가슴에 허전함으로 남아 있었어요. 저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참 많은 것을 찾아다녔어요. 덕분에 이렇게 삶의 경험이 풍성해지고 수행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아버지는 제 삶의 큰 스승이십니다.

택배로 도착한 못생긴 뿌리 식물이 여전히 남아 있던 그 허전함을 툭 건드리며, '이제 괜찮아.'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그간 여러 과정을 통해 머리로 이해했던 부분이 가슴으로 찾아오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다시 아침 기도를 하며 더 많이 더 깊이 가슴을 열어 제 안에 잠든 생명력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엄마를 독려하며 마 농사를 시작하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너무 걱정스럽고 잘 될까 하는 의심이 일어났어요. 아마 제 마음의 습관이었겠지요. 그리고 엄청난 의지로 치료와 치유를 해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에게서 난생처음 생명에너지를 느꼈더랬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농사를 마무리지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셨다는 것이 저에게는 남다른 감동이었어요. 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 전체로 찾아오는 순간, 흘렸던 눈물은 참 맑고 가벼웠어요.

아버지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도록 둥근마가 제게 왔나 봅니다. 수행하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장과 치유를 위해 찾아오는 것이라는 앎이 깊어집니다.

이 둥근 마라는 식물이 참 놀라워요. 겉모양은 진정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사랑은커녕 손댈 엄두가 안 나게 고집 세 보이고 혐오감마저 느껴집니다. 건드리기 쉽지 않아 며칠 방치했더니만 하얀 곰팡이가 생기더군요(농약이나 방부제를 만나지 않은 증거일지도...). 어젯밤 마음을 굳게 먹고 녀석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아껴주는 감정인가 봅니다.

5kg 한 상자, 여자 혼자 사는 살림에 살짝 버거운 모양새와 양입니다. 하지만 씩씩하게 감자 깎는 칼과 과도를 이용해 깎고 썰었습니다. 둥근 마 5kg을 갂아 깍둑썰기 하여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넣고 정리하니 1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제가 손이 좀 느리거든요. 생각보다 마를 손질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 1시간 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요. 귀가 좀 간지럽지 않으셨나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게 새명을 주시고 이렇게 일용할 양식까지 주셔서...'로 시작했지만 또 '그때 그래서 섭섭했고 미웠고 화났다'며 툴툴거리는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고 나니 아버지가 참 애쓰셨다, 수확해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느낌이 더 진해졌습니다. 올 한 해 잘 사셨어요. 저도 아버지만큼 잘 살았답니다.

오는 12월이면 천일결사 회향식이에요. 어느덧 7년재, 여전히 쉽게 상처받고, 불안한 마음에도 자주 빠지지만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꾸준히 기도를 할 수 있었던 덕분이에요. 살아오면서 어떤 성과보다도 수행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삶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어요. 기도할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마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문득 5차 천일결사 첫 입재식 때 제가 문경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그러고 보니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네요. 갑작스레 오빠가 세상을 떠났던 그때, 아버지에게 미움과 화만 일어나던 순간들. 저보다 더 많이 가슴 아팠을 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했구나.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서야 알아졌어요. 사고로 얼굴 형상이 변해버리고 나서야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죠. 그때 아버지 눈을 바라보고 함께 눈물 흘리지 못해 죄송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살아 계셔서 참 감사해요. 편지를 쓰다 보니, 여러 감정이 찾아오네요.

이제 정리하고 일해야 할 시간이에요. 잘 지켜보면서 감사하고 기쁘게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2010년 11월 25일 햇살 좋은 오후에

딸 민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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