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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희 Jul 17. 2020

뜨거운 물을 버린다

<오늘도 공부> 네번째 컬럼 초고 수정 중


지난 <오늘도 공부> 매거진에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후 몇 차례 할머니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온전히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마음 공간이 커지는 일입니다. 먼저 할머니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이 먼저 떠올랐어요. 참외, 조기구이, 매운탕, 문갑에 늘 있던 사탕, 마당의 작은 남새밭과 담벼락 곁에 직접 심은 수국과 철쭉, 가지런한 솜씨들. 그리고 할머니의 방 안의 성모상과 묵주. 자잘한 이미지에서 출발해 다양한 기억들을 느낄 수 있었어요.     


커다란 기억의 조각 하나는 지난 2005년 100일간의 기도대중(행자) 생활을 마친 뒤 출가에서 귀촌으로 방향을 바꾸어 약 8개월간 정읍에 내려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에요. 종교적으로는 마리아와 정묘향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수행을 했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던 손녀는 뒤늦게 할머니에게 귀한 가르침을 배웠음을 깨닫습니다. 할머니를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 8개월은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죠.      


예를 들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채소를 삶은 물을 버리거나 할 때예요. 마당에 뜨거운 물을 버릴 때 "뜨거운 물을 버린다." 말씀을 하세요. "누구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물으면 미물들도 다 듣는다고 알려줘야 한다고 하셨죠. 냉장고, 밥통, 가스레인지와도 종종 대화를 하시곤 했어요. 할머니와 함께하는 것은 무엇이든 오래 망가지지 않고 쓰는 이유가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할머니의 마음이었음을 이제 이해하게 됩니다.     


그해 김밥의 추억도 떠오릅니다. 여름날 성당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데 마침 재료는 마당에서 자란 부추와 달걀뿐이었어요. 우리 집은 수퍼도 5Km 이상 가야 하는 곳이죠. 일단 김이 있으니 메뉴를 김밥으로 정했습니다. 색깔이 세 개는 있어야 한다며 달걀지단을 두 가지로 만드셨는데 하나는 노란색 지단 또 하나는 고춧가루를 풀어 붉은색이 도는 지단을 만들었어요. 김 위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한 밥을 얹고 세 가지 색깔이 들어가니 제법 모양이 괜찮았어요. 맛도 좋았고요. 순간순간 정성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창의적이고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기억을 떠올리며 후회도 밀려왔어요. 삶의 예술가인 할머니의 꿈이 뭐였는지, 뭘 하고 싶었는지 물어본 일도 없었다는 것이 말이죠. 그저 할머니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고, 참외를 좋아하셨고, 밭일을 많이 하셔도 늘 정갈하셨고, 요리를 즐기셨던 분이라고 단편적으로만 생각했거든요. 며칠 할머니의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다보니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되네요.      


이제 마음이 약해질 때면 할머니를 떠올려야겠어요. 일제시대부터 6.25를 겪었고 한국 현대사의 풍랑을 겪었을 그 작은 몸과 손. 자녀들과 손자들까지 대화를 나누던 풍요로움과 지혜. 혼자서 밭에 물을 주고 가꾸며 정성스럽게 밥을 짓던 마음.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배움을 놓지 않았던 생활 습관들. 그것을 기억하고 알고 있는 나는 위대한 유산의 소유자입니다. 나의 존재가 새삼 귀해집니다.


달걀 후라이가 원망스러워     


기억은 여러 측면이 존재하는데요, 어떤 면에서 나는 늘 할머니에게 차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의 출발은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오빠와 함께 보내져 1년간 함께 살았을 때 부터였죠. 오빠의 밥그릇에는 종종 올려지던 달걀 후라이 때문이었어요. 소리 내어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달걀 후라이가 내 그릇에는 담기지 않았을 때 너무나 서운하고 서글펐어요. 그뿐인가요. 이후 제사며 명절에 남자 형제들은 부엌에서 일하지 않고 나가 놀아도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딸들은 당연히 심부름을 거들도록 한 것도 속이 쓰렸어요.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시골에 보내져 자랄 때입니다. 그때 보았던 할머니의 물건들은 참빗, 비녀, 외출용 모시저고리에요. 아빠의 재혼 후 서울로 올라온 저희 남매는 여름 방학 때마다 내려가 지냈어요. 그래서 여름 방학의 기억은 늘 풍성했어요. 나는 왜 할머니의 기분이나 상황보다는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늘 모자라다고 느꼈을까요. 이토록 받은 게 많은데도 말이죠.     


2005년 행자 생활 이후 기꺼이 맞아주신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놀랍습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도 잘 다니던 손녀딸의 '기행'이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존엄과 삶의 대하는 여유를 느꼈습니다. 감사란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순간 찾아오는 가치인가봐요. 할머니는 내가 어떤 상태로 있건 무엇을 하건 그저 지켜보고 매 끼니 맛있는 것을 내어주셨어요. 가끔 혼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을 돕다가 허투루 할 때와 할머니의 일과나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였어요.      


물론 할머니도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여유가 좀 없었어요. 며느리들에게는 꼼꼼함이 냉정함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과한 기준점이었을 것 같아요. 할머니의 취약함도 알고, 마음 속의 서운함도 있지만 내가 할머니를 내 편으로 여기는 것은 내가 쓴 글을 읽는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여성지 기자로 일을 시작 했을 때 두꺼운 잡지에서 내 기사를 찾아 차근히 읽어보시던 그 모습이 내겐 큰 격려이고 응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 시집와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가족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종종 내게 이야기 해주셨는데 기억이 선명치 않은 걸보면 제가 귀담아 듣지 않았나봐요. 어쩌면 제가 기록해주길 바라셨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나의 일부로 존재하는 기억들과 생각들을 느껴보는 것으로 마음이 한껏 든든해집니다. 할머니께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없는데 그것도 물어보고 싶어요. 반대로 내게 할머니께 귀엽고 사랑스런 손녀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엉뚱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보겠다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땠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언젠가 할머니께 한복 짓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해 간신히 시간을 마련해 바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었어요. 처음 나는 열정이 넘쳐 할머니의 일과에서 휴식시간을 뺏으면서 바지 본을 뜨고 손바느질을 시작했어요. 며칠 하다가 인내심이 바닥나서 팽개쳐 버리고 결국 완성하지 않았죠. 그 미완성 천 덩이가 꽤 오래 할머니 집에 있었어요. 그게 나에 대한 배려였음을 이제는 압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그 천은 콩을 담는 자루로 리모델링 되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지금 느껴보니 할머니도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듯해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것보다 본인의 세계가 뚜렷하셨으니까요. 요즘처럼 여러 변화 속에서 혼돈스러울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음이 떠오를 때면 할머니가 생각나요. 많이 그립고 보고 싶네요.


한복디자이너 홍상지 선생님 작업실에서 찍어온 습의. 꽃신 신고 다음생으로 간다는 의미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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