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아들은 말이 늦었다. 만 세 돌이 다 되도록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쏟아냈다. 발달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걸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마음을 놓았던 부분은 손가락질이나 눈빛 또는 동작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된다는 거였는데, 그러므로 괜찮다며 아무리 위로를 받아도 난 계속 조바심이 났다.
임신 기간에 사람들이 어떤 아이를 원하는지 물으면, 난 언제나 ‘건강하고 순한 아이’라고 말했다. 건강은 당연히 일 순위,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착하고 잘 웃는 아이이길 원했다. 아들은 잘 웃는 아이였지만, 친구들을 밀거나 물건을 잘 던지는 아이이기도 했다. 말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다 보니, 자꾸만 화가 나고 그 화를 행동으로 풀어내는 방식의 반복이었다.
유아기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부모 행동의 일관성과 단호함이었다. 칭찬으로 북돋길 원하면 어떤 경우에도 화를 감추고 온화하게 칭찬해야 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방식을 취하려면 부모는 언제든 아이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단하고 내밀한 귀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물론 나도 해봤다. 온종일 꾹 참고 부드러운 말과 표정으로 아이의 마음을 달랬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기 직전에 화가 폭발하여 아이를 울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난 아이를 안고 업고 몸으로 키워야 하는 시기에 많이 아팠고 힘들어서, 바닥에 누워 떼를 부리는 아이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고, 당연히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만 36개월이 될 무렵, 드디어 아이는 소위 ‘말로 표현’을 시작했다. 단음절 단어로 시작했지만, 차차 어휘가 늘었고, 또래와 무리 없이 소통이 가능했다. 점차 나도 말로 타이르는 일이 많아졌고, 아이도 스스로 인정하고 잠시 참거나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이때 참 많이 울었다. 뜻대로 다뤄지지 않는 아이 때문에 힘들어서 울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불편하고 억울한 상황에 아이를 밀어 넣은 게 모두 내 탓 같아 슬펐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었을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어떤 감정인지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야 할 과정이었다.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단계 중, 나와 아들은 유독 유아 단계에서 힘과 감정을 많이 소비한 셈이다. 아이에게 나의 실수를 말하고 사과한 적이 몇 번 있다. 엄마도 처음이라 몰랐다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너에게 집중하겠다고 말하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지금의 이 시간이 나중의 아이에게 보물 같은 밑거름이 되길 바라고 있다.
나의 삶에 주저 없이 훅 끼어들던 수많은 사람을 떠올려본다. 훌쩍 큰 키에 말이 어눌한 우리 아들을 흘끔거리던 사람들의 표정.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하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던 모습. 정말이지, 한국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애정’이란 이름으로 내 삶에 죄책감 없이 선을 넘곤 했다. 엄마인 내가 그들처럼 키우지 못해 아이가 그런 거라며, 날카로운 말끝으로 나를 할퀴었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지 못했다.
‘엄마는 괜찮아. 너의 속도에 맞춰 커나가면 돼.’라고 대범하게 마음을 가다듬지 못한 내가 조금은 안타깝다.
처음 도로 주행을 시작할 때, 운전자는 ‘초보운전’ 스티커를 뒷유리에 크게 붙인다. 조금 답답하거나 실수해도 이해해달라는 표현으로. 엄마로 살아가는 중간에도 그런 스티커가 필요하다. 우리 아이가 조금 느리지만, 열심히 가는 중이니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이다.
당신의 속도로 당신의 삶을 사세요.
당신과 다르다고 나를 재촉하지 말아 주세요.
나도 지금 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