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약속의 상징.
두루미를 알고 있나요?
살며 맺었던 여러 인연 중, 나는 유독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마음이 기운다. 그저 그 시절의 우리가 순수해서 계산 없이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장사’라는 것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아무 경험이 없었던 부모님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막상 전학한 학교의 교정이 그림처럼 예뻐서 조금은 덜 슬펐다. 교복이 제때 나오지 않아 나는 일주일가량을 평상복 차림으로 등교했는데, 그 시간 동안 느꼈던 서걱거림을 지금도 오롯이 기억한다.
“우리 집 큰 길 가에서 칼국수 집 해.”라는 말을 난 서슴지 않고 잘도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감춰야 할 이유도 없었다. 늘 배고팠을 고등학교 소녀들은, 다행히 누구나 그 말을 기쁘게 들었다. 토요일이면 친구들과 자주 가게에 들러 국수를 먹었다. 먹자마자 누워서 늘어지게 자던 친구, 다 먹은 그릇을 엄마에게 가져다주며 칭찬을 듣던 친구, 정말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친구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내 공간에 섞이는 그들에게 난 꽤 깊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우리는 꽤 자주 만났다. 신입생 생활 이야기에 서로 훈수도 두고 연애사도 체크하고. 남자 친구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그래서 뭐가 얼마나 좋았는지 얘기하며 까르르 숨이 넘어갈 듯이 웃고 또 웃었다. “임신만 안 하면 된댔어. 우리 언니가.” 유독 이성에게 관심이 많던 친구 한 명이 말했다. “그래? 아기는 원래 두루미가 물어다가 던져주고 가는 거 아니었어?” 누군가 농담으로 자칫 진지할 수 있었던 분위기를 탁탁 두드렸다. “야! 맞아. 우리 엄마가 나도 두루미가 물어다 줬다고 했어.” 우리는 모두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두루미’는 우리들 사이의 암호가 되었고, 즐거웠던 장면은 젊은 날의 책갈피처럼 서로에게 남았다.
아기를 기다리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우울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내 한숨을 느끼기라도 한 듯 “두루미가 바쁜가 보지. 순서 되면 갖다줄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고 친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친구의 입에서 쏟아진 ‘두루미’라는 세 글자는 상상 이상으로 너무 따뜻해서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다.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 때로는 그냥 기다려야 하는 일이 더 많을 거라는, 친구의 긴 토닥임이 가슴을 지나 머리에도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와 하는 생각이지만 아기를 전달하는 두루미가 마치 어딘가에 진짜 있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상은 오묘하고 신성한 질서를 토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기다림을 견디고 만난 아이는 나를 엄마로서 곱절은 성숙하게 해주었고, 더욱 현명한 방식으로 나의 아집과 교만을 내려놓게 했다. 꼭 그랬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힘에 부치는 상황이 올 때면 나도 모르게 두루미를 떠올리게 된다. 이 상황은 어떤 메시지인가. 난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과정이 더 중요하다며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늘 말은 하지만, 정작 시험에서 많이 틀려오면 벌컥 화부터 치솟는, 나는 지금 그런 엄마다. 아이에게 영원한 고향이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어느 날, 우연히 아들의 친구가 기르던 강아지를 만나게 되었다. 2kg이 채 안 되는 작은 말티즈가 아들의 무릎 위에 가만히 앉아 바지를 두세 번쯤 핥았다. 거짓말처럼 예쁘고 순하고 얌전한 강아지였다. “엄청 예쁘다. 너무 귀엽지? 봐 바. 강아지는 너를 좋아해.” 나의 말에 아들이 빙긋 웃었고, 손바닥으로 강아지 등을 만져 보았다. 두루미가 몰래 아이의 주머니에 용기를 심었던 걸까. 그날 하얗고 예쁜 강아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수도.
삶은 예상할 수 없게 흘러가지만 그래도 늘 좋은 곳으로 데려다줬다.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을 지도 모르는 순서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