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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Dec 11. 2018

그녀가 미쳐갈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레일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를 읽고.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 그녀는 모든 것이 다 두렵다. 특히 아이들이 죽을까 두렵다. 친구들이나 폴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모두들 틀림없이 다 그런 생각을 하리라 믿는다. 자기처럼 다른 사람들도 아이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몸이 시신이라면 어쩌나, 저 눈을 영영 감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생각한 적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머릿속에 끔찍한 시나리오가 떠오르면 머리를 흔들어서, 기도문을 외워서, 액운을 쫓으려 나무에 손을 대거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파티마상에 손을 짚어서 그런 생각을 지운다. 악운과 질병, 사고 포식자들의 사악한 탐욕을 쫓는다. 밤에 잠이 들면 아이들이 무관심한 군중 속으로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꿈을 꾼다. “내 아이들이 어디 있어요?"라고 그녀는 소리치고 사람들은 웃는다. 그들은 그녀가 미친 여자라고 생각한다.
p27


태어난 지 3주 가까이 되었으나 2kg을 겨우 넘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아이들이 잘 때 같이 자야 한다는 조언은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뿐이었다. 깨어서 뭐라도 움직임이 있을 때는 안심이었지만, 아이들이 자는 동안에는 깜빡 졸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아이 코밑에 손가락을 대 보고 가녀리지만 뜨거운 숨이 느껴져야 안심하며 불편한 자세로 쪽잠을 취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 내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갔다. 그리도 나도 꼭 저 글처럼, 내가 미쳐간다는 생각을 했다.



레일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장난감 더미 위에 부유하듯 너부러진 아기를 회색 커버 안에 누이고 뼈마디가 비틀어진 몸 위로 지퍼를 채웠다. 여자아이는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아이는 사나운 짐승처럼 맞서 싸웠다. 싸움의 흔적들, 아이의 말랑한 손톱 아래 박힌 살점들이 발견되었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아이는 몸부림쳤고 경련으로 꿈틀거렸다.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이 애타게 공기를 찾는 것 같았다. 목구멍에는 피가 가득했다. 폐에 구멍이 났고 파란색 서랍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p9


누군가 죽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 루이즈가 길을 걸을 때면 음산한 이 후렴구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녀가 지은 문장도 아니고 의미를 확실히 안다고 할 수도 없는 이 문장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세월이 두껍고 차가운 껍질로 심장을 뒤덮었고, 이제 그녀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겨우 들릴락 말락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이제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심장에 담긴 모든 애정을 다 소진했고,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스치지 않는다.
'이러니 벌을 받을 거야.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벌을 받을 거야.'라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소리를 듣는다.
p273



보모인 루이즈의 삶이 아이들에게 다가오기 전에 어떠했는지, 그녀가 고용주이자 아이들의 부모인 미리엄과 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아이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의존했는지에 관계없이, 이야기의 시작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즉 아이들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읽는 내내 너무 고통스러웠다. 

마치 그렇게 덧붙이면 더욱 훌륭한 '여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대 공쿠르상 열두 번째 여성 수상자라는 타이틀은 불쾌했지만 멋진 소설이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탄탄하고, 내용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섬찟한 사실 위에 흘러가지만 동시에 서글프기도 하다. 
아이를 잃은 폴과 미리엄, 수사하는 경찰들, 이 끔찍한 범죄에 충격받은 동네 사람들은 루이즈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아내려 하지만 입을 다문 루이즈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루이즈의 심리를 따라간 독자들은 그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발단을,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그녀의 정신 상태가 어떤 결론에 이르러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조금은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루이즈는 존재했지만 동시에 아무도 아니었다. 
보살펴야 할 대상이 있었지만 잃었고, 보살펴지지 못해 삶을 포기하려 했으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밀어냄을 당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공포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공포는 아이를 누군가에 혹은 무언가에 의해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아마도 모든 부모를 적어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그 두려움 위에. 
그리고 내가 느낀 또 하나의 공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공포이다. 루이즈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미리엄과 폴처럼. 누군가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살지만, 정작 나는 그의 실체를 모르고 그는 나를 해칠 수도 있는 현대사회 속 얕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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