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세 여자>를 읽고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름을 잘 못 외우는, 더군다나 책에서 읽은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금방 잊혀 스스로도 안타까워하는 나인데, 이 세 이름은 얼마나 깊이 박혀버렸는지 계속 생각이 난다. 아니 어쩌면 이 이름들이 그렇게 각인되어 버린 건, 내가 이 이름들을 계속해서 되뇌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입술을 움직여 가만가만히 불러보았다. 여러 번을 수없이 그 세 이름을.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은 1901년에, 허정숙은 1902년, 고명자는 1904년생으로 주세죽은 함흥 출신이고 허정숙과 고명자는 경성 출신이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상해에서 만났고, 그때까지만 해도 곱게 자랐으나 그것에 반항하여 홀로 상해로 갔던 허정숙은 3.1 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하고 나와 퇴학당한 후 상해로 온 주세죽과 금세 가까워졌다. 나머지 한 명인 고명자는 주세죽과 허정숙이 선배 여성운동가들과 여성인권을 이야기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인 조선 여성 동우회 강연에 구경하러 나왔다가 인연이 되었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권리 없는 의무만을 지켜오던 여성 대중도 인류 역사의 발달을 따라 어느 때까지든지 그와 같은 굴욕과 학대만을 감수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게 되었다. 우리도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으며 권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다. 우리는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성의 압박, 노예가 되고 말았다. 저 무리한 남성은 우리가 가졌던 온갖 권리를 박탈하였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오직 죽음과 질병만을 주었다. 아! 우리도 살아야 하겠다. 우리도 잃었던 온갖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겠다....
세 여자 1권 p79 <조선 여성 동우회> 창립 선언
이 여인들이 한 일들, 이 여인들이 겪은 일들, 이 여인들의 삶과 함께한 역사의 소용돌이들을 옮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니, 열심히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고 붙이고 또 붙였으나 너무나 많아서 옮길 수가 없다.
내게서 건네받아 읽기 시작한 남편과도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하는 역사인데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만을 마치고 외국으로 간 내 기억에 학교에서 이런 근현대사를 밀도 높게 다룬 기억이 없다. 모든 정규 교육을 마친 남편 또한 그렇다고 하니 참 별일이다. 지금의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중고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라는 곳이 2017년인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접하는 외국의 모습처럼 역사적 사실들을 놓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아님은 알겠다.
시대별로 접하는 어려움을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감히 가늠할 수도,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때의 고민이 지금의 고민보다 중하다 경하다 할 수 없고 지금의 고민이 그때에 비해 보잘것없다 할 수 없으나, 그 시절 독립을 위한, 혁명을 위한 투쟁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모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임하는 그 신념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싶어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죽는 순간까지 올곧았던 순교자들의 신앙 같은 것일까. 주세죽과 고명자는 아직은 젊었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허정숙만이 김일성의 신뢰받는 간부로 노년까지 살다 91년에 사망했으니 이 세 여인의 삶은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갔다. 함께 투쟁하였으되 함께할 수 없었던 삶. 그 시대는 그랬던 것이다. 신념을 위해 사랑도 이별도 우정도 모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어찌 보면 세 여자 중 허정숙만이 연애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자기가 주도하였는데 결혼은 세 번, 그 사이에 가벼운 만남도 있었고 첫 번째 남편인 임원근은 옥살이하던 중에 찾아가 이혼 서류를 내밀었으니 다시 한번 이 여인의 출생연도를 확인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녀는 자식들과도 연락하며 살았고 남편들과의 관계에서도 늘 주도권을 잡았으며 본인의 사상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비참한 죽임이 아닌 노년의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 세 여인 중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삶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고명자, 귀한 딸로 고이 자랐으나 주세죽과 허정숙의 영향으로 여성해방을, 이어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에 발 들이게 되고 가문에서는 외면당하고 김단야의 생사도 모른 채 긴 세월을 그를 기다리며 온갖 고초를 겪은 그녀. 후에 김단야와 주세죽이 결혼하여 지냈다는 이야기를 허정숙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들을 이해했다. 그리고는 쓸쓸히 죽어갔다. 아무도 없이, 홀로, 굶주릴 대로 굶주린 몸과 허약해서 더 이상 정신을 지탱할 수 없었던 육신만을 남기고.
주세죽, 나는 그녀의 이름이 사실은 제일 아프게 남았다. 나 자신이 힘든 과정을 거쳐 아이를 낳아본지라 어느 특정한 일에 감정이입이 심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에 그런듯하다. 혁명을 위해 아이 낳기도 미뤘던 여자. 혁명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낮추고 청년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운 여자. 열차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여자.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서야 했던 여자. 유배지에 가는 동안 아이를 잃어야 했던 여자.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아이로부터 냉대 받아야 했던 여자. 고난의 시기를 함께한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여자. 그렇게 죽어간 여자. 주세죽은 누구보다도 혁명적이고 저돌적인 여성이었는데 그렇게 사라져 가다니.
백 년 전.
아마도 우리가 모를 수많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중 이 세 이름을 꺼내어 그 방대한 서사를 두 권으로 만든 이 작업은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을 읽은 후 만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있다. 청소년부터 장년까지. 이 책은 읽는 이에 따라 그저 픽션으로 읽고 싶다면 그래도 될 만큼 매우 재밌게 쓰였지만 조금 더 나아가 알아보고자 한다면 수많은 가지를 치게 하는 책이다. 나처럼 그 시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면 며칠을 헤매게 할 테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권하고 또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