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바텐더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 Sep 22. 2015

bartender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데서 일하면서 버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을 거야."


그는 아주 덤덤하게, 마치  주말 데이트를 기획하는 정도의 가벼움으로 자신의 제안을 설명했다.


"어차피 나도 바쁘니까 자주 만날 수는 없고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 만나는 걸로 삼 백을 생각하고 있는데. 적다고 생각하면 모란 씨가 생각하는 금액을 말해주면 좋겠어. 적절한 선에서 맞춰 줄 용의가 있어요."


"솔직히 이 얘기는 당황스럽네요. 뭐라고 대답 해야 할지..."


나는 최대한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말을 골랐고, 오해를 사지 않을 만큼의 미소만 얼굴에 띄웠다. 느릿하게 말의 속도를 조정하면서 머릿속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재치 있게 받아칠 수 있을까, 정답을 검색하느라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은...


".... 씨는 싱글이잖아요. 뭣 때문에 돈으로 애인을 만들려고 해요? 그냥 좋은 사람을 사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피곤해서 그래. 이젠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고. 내 스토리 알잖아? 이혼할 때 고생한 생각하면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은데, 내 나이에는 연애를 하면 다들 결혼을 생각하더라고. 괜한 사람들한테 기대주기도 싫고 진지한 관계는 부담스러워."


잔에 담긴 호박색 위스키를 홀짝 거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쪽의 언더 락 잔에 담긴 갈색의 위스키는 점점 옅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딱 이 쯤의 색깔이 내가 좋아하는 만큼 희석된 위스키의 빛깔이다. 단숨에 들이키고 싶은 욕구를 참아가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또 이 나이의 남자가 혼자 여가를 보내는 것 처럼 볼 품 없는 일도 없고. 그리고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외로움을 타더라고. 물론 섹스도 중요하고, 내가 모란 씨랑 그걸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닌데, 사실 그것보다는 같이 좋은 걸 보러 다니고, 또 여행도 다니고, 빈 시간들을 같이 보내줄 여자가 필요해."


"그  조건에 ... 씨 정도라면 아마 저보다 더  괜찮고  젊은 여자분을 만나실 수 있을 텐데요. 저한테는 과분하네요."


말의 뉘앙스가 보다 부드럽게 들렸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더욱 더 입꼬리를 올려 환한 얼굴로 말하였다. 마치 이 모든 대화가 단순히 주고받는 농담처럼 흘러가도록. 하지만 점점 슬퍼지는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린애들은... 육체적으로는 좋겠지. 하지만 걔들은 대화도 안 통하고, 공감대도 안 통하고. 무엇보다 이기적이고 참을성이 없어. 난 딱 모란 씨 정도의 나이가 좋아. 우린 말도 통하고, 외모만 그럴 듯하고 머리는 텅텅 빈 여자들하고는 다르니까. 그런 애들은 룸에만 가도 널렸어. 난 그냥 같이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여자가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지만 이런 제의도 모란 씨니까 하는 거야.  투잡 뛰면서 일하는 거 지친다고 하지 않았어? 내 말대로 하면 금적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훨씬 많이 생길 거야.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합리적인 선택을 해요."


이 남자는 39세의 회계사. 꽤 오래전에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을 마감한 잘 나가는 돌싱남이다.

가게의 단골이었고, 몇 개월 동안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었다.

돈을 허랑방탕하게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적절한 매상을 올려주면서 매너도 훌륭하였기에 가게의 모든 직원들이 좋아하는 손님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 나도 그를 좋아했다. 바텐더와 손님으로서 보다 더 많이.

경제적으로 이룬 남자의 여유와 자신감. 대체적으로 편견 없는 행동들. 절제하는 모습이나 대화가 즐거워지는 풍부한 지식. 이성으로 조금도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하지만 이 대화는 그 모든 감정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되도록이면 내게 모욕감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이 계약을 설명하였고, 거듭 다른 여자 한 테라면 절대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와의 관계의 특별성을 강조하였다.

약 6개월 정도, 이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으로 그를 만났고 우리는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사와  문화에서부터 아주 개인적인 인생사까지. 시시껄렁한 말장난으로 키득거리기도 하고, 다른 누구한테는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은밀한 마음속의 이야기로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리기도하였다.

그러한 우리가 나눈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는 저 제안이 나로 하여금 나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만들었다.


내가 그의 직장 동료였거나, 그의 지인의 소개 자리에서 만났거나, 혹은 다른 기타등등의 단체에서 만난 사이였다면 그는 내가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스폰 제안'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나는  '성'을  상품화하여 술을 파는 가게의 종업원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다른 많은 여성 바텐더들과 같은. 그리고 우리를 보는 다른 많은 남성들과 같은 시선으로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실망하였고 슬펐지만 어찌보면 그 덕분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 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바텐더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쓰는 이야기는 바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약간은 변질되고 특화된 여성 바텐더들의 이야기이다. 혹은 그러한 곳에 출입하는 남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전 02화 bartender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