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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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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Sep 30. 2015

bartender 5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1

문 안의 모습이 마치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기이한 다른 세상의 모습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는 한참을 입구에서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자리로 인도하고 메뉴판을 건네주며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성가시게 되었다는 속마음을 숨긴 채.


아니나 다를까, 메뉴판을 교과서 보듯 꼼꼼히 읽어보는 그의 안색이 흐려진다. 그렇지, 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맥주 한 병에 만원이 넘어가는 가격이 어떻게 보일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자, 이 남자가 다음에 오겠습니다, 라며 자리에서 일어날까, 아니면 비교적 싼 버드와이저나 카스 같은 맥주를 태연한 척 시키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돌아갈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앱솔루트 보드카를 주문하며 내게 물었다.     


"안주는 따로 시켜야 하나요?"     


"저희가 양주를 드시는 손님한테는 과일을 조금 서비스로 드리니까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없으시면 안 시키셔도 되요."     


보드카의 세팅을 준비하면서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분명한 초짜 바 고객이다. 입구에서부터 이 세계의 룰을 파악하기 위해 주춤거렸고, 안락함을 위해 만들어진 바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바텐더들에게 시선도 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초짜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자마자 속으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세상에! 카스 한 병에 칠 천 원이라니, 이런 도둑놈들!'     


단순히 술 한 병의 값으로 그것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칠천 원 안에 값비싼 바텐더의 인건비가 녹아 있다는 것을. 초짜 손님들에게 그런 이해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그들은 다소 사기당하는 기분으로 술자리를 시작할 것이고 그런 손님을 상대하는 건 바텐더로써 결코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가 젊은 여자 바텐더 앞에서 호기를 부리려고 예상치 못한 주문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적정 매출이 나와 주었으니 내 임무를 다하여야 했다. 나와 다른 바텐더 동료가 그의 바 앞에 앉았다.     


"바는 자주 안 다니시나봐요?"     


“이런 곳은 좀... 친구들 따라 와 본 적은 있어도.”     


남자는 어두운 안색만큼이나 입이 무거웠고, 낯을 많이 가렸다. 대화는 당연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지루한 시간들이 흘러갔지만 우리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결국은 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저는 말이죠...”     


술병의 보드카가 삼분의 일쯤 남았을 때야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 전자기업의 연구원인 그는 전업주부인 아내와 초등학생에 갓 입학한 아들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고,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이래저래 살다보니 승진하고, 아파트도 장만하고……. 그야말로 ‘보통’이라는 단어를 구체화시켜놓은 그런 남자였다. 본인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였고, 가끔 동료들과 여성이 있는 술집에 가는 것 이외에는 일탈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짓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성격에 기인한 결과인데, 주제넘게 판단해보자면 그는 딱 ‘실용적인 꼰대’ 였다.

보수적인 성격에 고집도 세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의심과 경계심이 강했다. 그러나 오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실리를 위해서는 말을 아끼고 자기 고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배웠고, 단순쾌락을 위해 돈을 낭비하는 것을(이를테면 그거 한번 하자고 퇴폐업소에 내가 그 돈을 주고? 미쳤?) 헛되이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욕구를 절제하고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힐만한, 혹은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를 만한 언동을 삼가고 살아 온 이 남자 손님은 매일 밤, 잠이 들 때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오늘도 결점 없는 하루였다.’     


그렇게 무난하고 시시했던 그의 인생에 신이 사건을 내려주었다. 현대사회에서는 발에 채일만큼 흔한 일이지만 이 남자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내가 이혼을 하자고 집을 나가서 벌써 한 달 째 가출중이에요.”     


긴 시간 주저하다 꺼내 놓은 이 말이 그가 낯선 바에서 그의 소비의식에 역행하는 비싼 술을 시킨 이유였다. 그는 술이 아니라 상담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닌, 존경하는 선배도, 그를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혹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사람들도 아닌,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접점도 없는 낯선 어린 여자들에게, 그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큰 오점이 될 수 있는 이 사건에 대해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오는 대나무 숲이 되어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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