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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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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Jun 22. 2016

bartender 22

해장국 blues 3

5월에 끝난 개인적인 행사에 나는 많은 지인들에게 초대장을 돌렸고, 그 안에는 바텐더로써 만난 손님들도 몇 몇 포함되어 있었다. 

걔 중 한 둘은 시간이 맞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고, 몇 몇은 참석하였다.

행사는 바텐더의 일과는 전혀 무관한 나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들은 바 안에서 화장, 적절한 복장과 영업적 매너로 무장한 바텐더가 아닌 인간 모란을 보러 방문하였고, 나는 그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들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어두컴컴한 조명아래의 친절하고 여성스럽고, 어쩐지 깍듯하게 거리감을 두는 그녀가 아닌, 허둥대며 들떠있는 목소리, 수수한 맨 얼굴로 방문객의 칭찬에 몸 둘 바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는 어수룩한 처녀였다. 


취객의 값싼 흥미 앞에 중무장했던 페르소나를 벗고 나의 맨 살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방심의 근거는 무엇일까? 내게 초대받은 사람들과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바텐더들이 소중한 개인시간을 할애하게 하며, 손님과 직원으로 서로를 구분 하고 거리감을 유지시켜주는 바를 치워버려,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로 서로를 대면케 하는 부담감을 능히 넘겨버릴 수 있게 하는 그 조건은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내가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손님들은 아주 오래된 단골이다.

최소한 5개월에서 길게는 3, 4년을 보아왔던 면면들이다. 한 가게에서만 보았던 사람도 있지만, 연을 넘기며 본 손님들은 내가 옮기는 가게마다 고맙게도 찾아와 주었던 분들이다. 이 정도면 손님에서 지인으로 넘어가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람과의 관계에 시간이 꼭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숨길 수 없다.      


첫 만남에 매너 좋은 신사가 어느 순간 희롱하는 말을 예사로 던지는 능구렁이가 되고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한 떨기 아끼는 꽃처럼 조심하며 던지는 감탄사가 천박한 욕지거리로 되돌아오는 것을 번번이 목격하였다. 애초에 그러한 인간들이 얄팍한 가면을 던져버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은 술을 파는 곳이고 우리는 그 곳에서 일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여자들이니까.(그들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별로 조심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다만 젊은 여성이라는 조건이 그들에게 성적인 기대감을 주어 몇 번의 손쉬운 노력으로 달콤한 꿀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신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만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 깨달음은 본연의 흑심을 폭력적으로 표출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첫 만남에서 말이 잘 통하고, 그 시간이 아무리 즐거웠던들, 우리는 저 껍데기를 경계하며 신규 손님의 해장국 제안에 난색을 표한다. 오히려 좋았던 인상은 ‘그럼 그렇지, 이 새끼도 뻔할 뻔자로구나.’ 라는 회의로 변하게 된다. 설령 그런 마음이 없던 들, 본인이 바텐더를 여자로써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맹세코 추호도 없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증을 받더라도 단 한 사람, 그 제안을 받은 바텐더의 냉소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쉽게 표현하자면,     


‘내가 널 뭘 믿고?’     


그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바텐더들의 속마음이다. ‘안심’이라는 딱지가 붙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난폭하지도 않고, 음흉하지도(이건 완벽하게 그렇지 않기는 불가능하지만...) 않으며, 해장국 한 그릇의 허락을 어느 침침한 모텔방 침대 위로까지의 연장으로 여기지 않으리라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한 송이 꽃만큼의 가벼움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바텐더들이 자신만의 삶과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시켜 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시간이 축척되면, 가게 안에서 내가 그를 보더라도, 그가 나를 보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바를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더라도, 우리는 바텐더와 손님의 모습으로 만나 인간과 인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관계가 된다면 장소는 어디라도 상관이 없어질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중심에는 신뢰라는 추가 무겁게 매달려 있을 것이니. 

이것이 전제해야만 바텐더들은 손님과 나를 보호해주는 가게가 아닌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쓴 훈훈하고도 그럴 듯한 조건 위에 얹어 그다지 썩 드러내지 못할 조금은 부끄러울 조건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매상’

안타깝게도, 제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진, 안전과 신뢰라는 면에서 누가 보아도 믿어 의심치 않을 그런 손님이라도, 그가 결국 맥주 한 두병으로 끝나는 손님이라면, 바텐더들이 쉽게 자기 시간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위험의 문제가 아니라 소득없이 개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당연한 계산에서 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손님과 밖에서 만나서 어떤 즐거운 시간을 보내든, 그것이 내 친구들과의 만남보다 더 뛰어난 시간일 수는 없다. 업무의 연장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소중한 개인시간을 손님과 보낸다, 그것은 그 손님이 어지간히 매력적이거나 호감이 가지 않는 이상은 어려운 일이다. 혹은 그가 가게의 아주 중요하고 중요한, 한 마디로 말해서 제법 돈이 되는 손님이거나.     


인센티브를 받는 바라면 두말 할 나위 없지만, 인센티브를 받지 않는 바라고 해도, 가게의 매상이 바텐더들에게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닌 이상 돈을 크게 쓰는 손님들을 중히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급적이면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다른 가게로 가서 낭비할 돈을 우리의 가게로 와서 낭비하게끔 유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별한 친밀감을 서로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와 내 동료 바텐더들에게도 소위 ‘우리는 패밀리야!’ 라고 웃으며 서로를 칭할 수 있는 손님들이 있다. 긴 시간 단골로 오며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신뢰를 쌓고 또한 쩨쩨하지 않은 매상을 올려주어 그를 위해 서브한 시간들이 아주 보람차게 느껴지는 그런 손님들이.     


믿음이 가고, 가게의 매상에 도움이 된다.     

그런 손님이 일 끝나고 사주겠다는 해장국을, 혹은 출근 전이나 휴일에 사적으로 만나 수도권 인근의 장어나 한우 같은, 어린 바텐더들에게 조금은 비싼 별미로의 초대를 쉽게 거절할 수는 없다. 개인 시간을 좀 버리더라도 ‘그냥 맛있는 거 얻어먹으러 가지 뭐.’ 하면서 체념 반, 기대 반으로 손님의 초대를 승낙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대게 일 대 일이 아닌 손님과 바텐더‘들’의 조합으로 만나게 된다. 아무래도 여성과 남성의 만남이다. 우리는 식구, 패밀리라며 바 안에서는 떠들 수 있지만, 오랜 시간 피치 못하게 영악해진 바텐더들은 남녀가 단 둘이 하였을 때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와 처음에는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작디작은 나쁜 기대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그런 여지 자체를 원천차단하고 싶을 것이다.     


“박 부장님이 일요일 낮에 XX동에서 회 사준다는데 언니 갈 수 있어?”     


보통 이렇게 동료들의 의견을 묻고, 서로서로의 방패가 되어 줄 인원이 확충된다면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누군가 그런 제안을 받으면, 우리는 좀 피곤하거나 퇴근이 늦어지거나 하더라도 의리로써 동행을 해주게 된다. 결국은 가게를 위한 일이고, 우리를 위한 일이니까.      


하지만 한 번은 그 의리에 발목을 잡혔던 적도 있다. 꽤 오래전 일했던 어느 바의 동료 바텐더, 그녀를 A라고 칭하겠다.

A는 그 가게에서는 나 보다 한참 선배였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으나 오랜 바텐더 경력이 있었고, 가게에서는 어느 바텐더들 보다 오래 일했던 고참이었다.

그녀는 참, 바텐더가 천직이다 싶게 술을 좋아했고, 화통했으며, 영업시간 중에 누구보다도 빨리 취했다. 술이 술을 부르는 주사를 가지고 있어서, 취했다 싶어도 자제하는 법이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건사고를 불러, 열시, 열한시, 열두시, 시간이 늦어지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가 취했나 안취했나 안색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대장부 같이 털털했던 성격 이면에 꽤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랬는지, 그녀는 영업시간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길 싫어했고, 종종 손님들과 ‘나가서 한잔 더’ 약속을 잡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혹은 자신이 취했기 때문에 혼자는 부담스러웠는지 언제나 나를 동행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처음 몇 번은 그녀의 손님과 밖에서 한 잔 요청이, 가게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었기에 나는 기꺼이 피곤과 귀찮음을 무릅쓰고 참석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녀가 그저 아무런 변별 없이 처음 온 손님이라도 조금 젊거나 마음에 들면 오케이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질 낮은 손님들과 동석하여 기분 나쁜 경험을 몇 번 하였고, 꽤 위험한 상황에 맞서 술에 떡이 된 A까지 챙기며 그 손님 같지 않은 놈들과 몸싸움 비슷한 짓거리도 한 번 하고보니 다시는 A의 요청에 응해주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역시 걱정되는 마음에 A에게 충고도 하여보고, A 대신 손님들의 해장국 제안을 쌀쌀맞게 거절도 하여보고, 많은 수를 써보았으나 A는 변하지 않았고, 그녀의 행동이 결국 지나칠 지경이 되어 손님들로부터 ‘저 곳은 2차가 되는 바’라는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고, A 이외의 다른 바텐더들의 강력한 항의로 그녀는 그 바에서 나가게 되었다. 

후에 A의 이야기를 다시 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녀는 내 기억에 손님들의 ‘해장국’ 요구에 가장 최악으로 대처하는 바텐더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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