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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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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21. 2016

bartender 23

해장국 blues 마무리.

그래서 정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도 사실 정답은 없다.

공과 사의 영역이 우리만큼 모호한 직업도 드물겠지만 또한 공과 사의 영역을 우리만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직업도 드물 것이다. 이 모순적인 지침은 때로 미로 속을 더듬거리며 걷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양 갈래의 이정표를 던져놓기도 한다. 


손님과의 사적인 만남,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겠습니까?


외로움에 사무친 바텐더 A는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끌고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만남을 거듭한 끝에 가게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손님들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누구보다도 사적인 관계를 가장하지만 그들의 요구가 가게문을 넘어가게 되면 이것은 모두 업무였을 뿐이었다며 단호한 선을 그어야 한다. 친분의 깊이를 헛짚은 누군가에게 가차 없이 찬물을 뿌려줘야 한다. 그 괴리감이 괴롭다. 


모던 바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그것을 거절하는 일이 어째서 간단하지 않은 것인지.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를 왜 바텐더들은 본인들의 의지로 거부하거나 승낙할 수 없는 것인지. 더 높은 인센티브를 받기 위하여? 가게의 매상을 위하여? 나를 목적으로 오는 단골을 확보하기 위하여? 차가운 거절의 말을 들은 손님이 더 이상 가게에 발걸음을 하지 않을까봐?

명쾌하고 풀기 좋게, 그들은 단골이니까,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있으니까, 안전하니까........ 그것이 전부일까. 눈 앞의 손님에게 거절의 말을 주저하게 만드는 모든 원인은 그들의 요구가 나나 가게에 이득될 것이 없기 때문 만일까. 


나를 보고 오는 손님 중 내게 가장 큰 매상이 되었던 손님은 단연코 이전에 얘기를 풀었었던 ‘재벌3세’ 님이었다. 가게의 이득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가 내게 밥 한끼 먹자 제안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거절하지 못해야 할 손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 누구보다도 사석에서 만날 수 없는 손님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특별한 공상의 유대가 박살이 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술 한 병 만큼의 교감.

많은 거짓과 속셈을 안고 시작한 대화 속에 실낱같은 진심들이 야광충처럼 희미한 빛을 발현하면, 대상이 었던 서로는 ‘상대’가 된다. 목적을 떠나, 마지막 술 한방울이 비워지는 순간까지 자신도 모르게 잠깐 잠깐 비추던 외로움, 인간적인 어떤 것들로 우리는 작은 결과물을 만들고 그것이 그대로 아름답게 마무리 되기를 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욕심에 상대가 그 이상의 것을 원하며, 완결된 이야기에 엉터리 속편을 더 추가하고 싶어하면 나는 당황스럽고 불쾌해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분 좋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이에 마주한 바의 위력이다. 나이차이, 개인적인 상황의 차이를 서로의 자리에게 넘어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적절한 간격을 사이에 두어야만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없이 인간적일 수 있다. 


그러한 간격은 서로의 완전한 동의하에 좁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들이 우리가 서로의 민낯을 보여줌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간격을 좁혀 마주 본 상대의 얼굴이, 멀리서 짐작하던 그 어렴풋한 환상이 나와 같은 사람의 얼굴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바에서 만나 술의 기운으로, 어두침침한 가게의 공기와 약간의 들뜸, 나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상대와 함께 만든 즐거운 시간과 유대를 거절의 말로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결국 나는 너를 손님으로 밖에는 보지 않았어, 제발 착각은 하지 말아줘. 라는 말을, 그 동안 네게 했던 나의 배려, 위안, 인간적 동정이나 감탄, 칭찬과 교감은 모두 사실은 거짓이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선을 하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텐더로써의 의무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해장국에 관한 이야기를 긴 시간 쓰지 못한 것은, 마무리가 다소 맥락 없이 쓰여진 이유는 사실 위의 사실을 내가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그들의 해장국의 요구를 그토록 언짢아하며 짜증이 났으며 거절의 말을 꺼낼 때마다 끝까지 무뎌지지 않는 괴로움을 느꼈던가.

결국은 바텐더의 존재가, 우리가 하는 행동과 말이 많은 부분 위선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때로는 꾸밈없는 모습으로 바의 도움 없이도 서로에게 인간일 수 있는 상대도 있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손님들 중에 그런 사람들의 비율은 아주 낮다. 그 이외의 상대들에게도 우리는 거짓으로 웃어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가증을 떨어준다. 가게 안에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바텐더라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이것은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개인의 영역에서 까지 그럴 수는 없다. 상대가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침범하려 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가면을 벗어야 한다.


아니요, 당신은 손님일 뿐이고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그런 척 하는 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그래, 나는 그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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