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 blues 2
그럼 실제 어떨까? 바텐더들이 손님과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그들의 요구에 호응해주는 바텐더들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손님’은 가능하고 어떤 ‘손님’은 거절당할까? 그리고 가게의 입장에서 바텐더들이 손님들과 사적인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득일까, 실일까?
마지막 질문부터 대답하자면, 음... 가게입장에서는 바텐더들과 손님들의 사적인 만남은 그다지 권장할만한 것이 못된다. 내가 겪었던 어떤 오너도 그러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밖에서 손님을 만났다가 잘린 바텐더도 있다. 바텐더 개인적으로 손님을 만나는 행위를 아예 금지하고 배격하는 가게도 많다.
이유는 가치를 떨어뜨린 다는 것에 있다. 바에서 파는 주류들은 대체로 일반 술집보다 서너 배 이상 비싼 것이 당연하다. 앞서 글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듯이 술 값 안에는 바텐더와 대화할 수 있는 권리비용이 숨어있고, 그 때문에 손님들은 기꺼이(혹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갑을 연다.
이 가게 안에서, 당신이 여기에 와서 술값을 지불하였기 때문에 나와 대화할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이 암묵적인 원칙을 알기 때문에 바텐더들을 만나고 싶은 손님들은 지갑을 두둑이 채우고 가게의 문을 닳도록 넘나든다.
그러나 많은 손님들이 이 원칙에 순종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불복하며 호시탐탐 원칙을 깨트릴 속셈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십만 원 삼십만 원 쓰느니 밖에서 진짜 맛있는 거 사먹으면서 돈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가 랍스타 진짜 잘하는 집을 알고 있는데...”
“내가 솔직히 여기서 30년 한 병 깔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그 돈이 모란씨한테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둘이 진짜 제대로 된 음식점에서 백만 원 쓰는 게 낫지.”
이 시덥잖은 수작들 속에는 뭐 물론 바텐더들을 하나의 여자로 보면서 최종 목표점인 ‘침대’로 끌어 들이고 싶은 속내들이 있다는 것은 말해봐야 입이 아플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유 무형의 가치를 얻기 위함이다. 바에서 소비하는 돈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들이 보낸 시간과 술값으로 치환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다른 목적을 위한 투자의 개념으로 여겨진다면, 그들이 끊임없이 바텐더들을 가게의 밖으로 꾀어내려 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이제 그 바에는 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꼭 그 목표가 침대가 아니고 그저 가게 안에서 손님과 바텐더와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밥 한 끼 먹고 자연스럽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바텐더와 새벽녘에 나와 해장국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조금 더 편하게, 다른 손님이나 가게의 마감시간이나, 둘 사이를 가로막는 여타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 마주하고 보내는 비용은 아마 바에서 쓰는 돈의 절반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바텐더를 만나러 바에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번 허용된 사적인 자리는 두 번, 세 번의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바에서 쓰는 돈들이 아깝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텐더들이 손님간의 사적인 자리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초창기에 내가 초보 바텐더일 때만 해도, 그런 일들은 거의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고, 손님들 역시 설령 마음속으로는 그러한 기대가 있을지언정, 입 밖으로 감히 꺼내놓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새벽 네 시, 가게 문을 닫고 동료 바텐더들과 그 날 우리를 괴롭혔던 손님들을 입담으로나마 밟아주기 위해 찾은 실내 포장마차 안에는 어떻게 봐도 바텐더인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섞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다른 데서 일하는 바텐더 인가 보다.’
물론 우리들의 정체도 상대방들에게 대번에 들켜버린다. 즐겁게 홀을 꽉 채우던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까닭 없이 목소리의 볼륨이 줄어든다.
동종업종의 경쟁자이기도 한 우리들은 서로를 눈치껏 가늠하며 경계한다. 그리고 그들과 한 자리를 차지한 남자들에게 귓속말을 하기도 한다.
그 친근한 품이 아마도 꽤 오래된 단골들과의 술자리임을 짐작하게 했다.
이제는 낯선 광경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나와 같이 투잡으로 바텐더를 하는 사람들은 다음 날 일정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가능하면 피하려고 애쓴다. 투잡이 아닌 바텐더들도 마찬가지이다. 손님과 술을 마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것이 가게 안이 되었던, 밖이 되었던.
간단히 말해서 업무의 연장이다. 직장인으로 치면 야근이 되겠다. 수당도 못 받는 야근.
“편하게 생각하고 가면 되잖아. 그냥 맛 있는거 얻어먹는다고 치고.”
속 모르는 소리하는 손님에게 나도 모르게 톡 쏘아 붙인 적이 있다.
“회사일이 끝나서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빨리 집에 들어가서 눕고만 싶은데, 상사가 와서 편하게 술 한 잔 하지? 내가 쏠게라고 하면 퍽이나 반갑겠어요, 그쵸?”
게다가 손님들의 대부분은 바텐더들을 업무 중에 이미 지치게 만든다. 제 아무리 신사적이고 매력적이며 재미있는 손님일지라도 그들이 갑이고 우리가 을이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함께 하하호호 세상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하면서 웃고 떠들어도 바텐더들은 지쳐버리고, 적당히 매상 올리고 즐겁게 놀았으면 이제 계산하고 좀 가주면 안 되겠니, 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속마음이다!(너무 솔직해서 미안하지만...)
그런데 그 와중에 밖에서 또 따로 술을 마시자니, 오 맙소사, 제발 그만해.
“아니, 진짜 손님 아니었으면 쳐다도 안 봤을 남자들이, 내가 진짜 자기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일이니까 맞춰주는 거지!”
동료 바텐더가 울부짖었다. 근 한 시간가량 해장국 한 그릇의 집요한 요구에 시달리다가 결국 터져 버린 것이다.
요는 결국 그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할 수 없다. 술을 주문하면 누구든 맞이해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고는 이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텐더의 문제 이전에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가, 없는가.
적어도 업무가 끝난 시간, 내가 바텐더가 아닌 시간에는 내게 온전한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손님들의 요구는 나에게 갑의 입장에서의 압박으로 다가올 때가 대다수였다.
그들도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너희에게 돈을 썼는데, 이 ‘작은 요구’를 거절하면 너희는 진짜 나쁜 년들이지. 기저에 이러한 심리가 알게 모르게 깔려있을 것이다. 나는 많은 경우 그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불쾌한 압박이었다.
가게에서 권장하지도 않고, 바텐더들 역시 피곤할 뿐인 손님들의 해장국 합석 요구는 이런 이유로 바텐더들에게 대부분 거절당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으니, 그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바텐더들이 너그럽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의 비결은 바로 ‘단골’ 과 ‘매상’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