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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sh Jul 08. 2019

50대 문과생과 30대 문과생의 한 대화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사실관계를 다소 희석함을 양해 바랍니다.


아주 우연의 일이었다. 강남 길거리에서 A 차장을 만난 것은.


그와 나의 인연은 이렇다. 난 첫 직장에서 A 차장을 만났다. 내가 수습사원이던 시절, 그는 한 부서의 중책으로 부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몇 번 승진을 물을 먹었고, 더 이상 조직에서 버티지 못했다.


이후 몇 번의 이직을 거듭한 끝에 현재 한 중소업체의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본 글에선 첫 인연 때의 직함을 살려 'A 차장'이라고 부르도록 한다.)


그런데, 그가 어디서 무슨 모습이든 그게 뭐 대수인가. 10년 만에 그를 조우한 나는 반갑게 인사를 걸었다.


미생의 한 장면. A 차장을 처음 만났을 때 나와 그의 모습도 아마 이와 흡사하지 않았을까.


"선배님. 저 에니시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가 화답했다.


"어이, 아저씨. 오랜만이야." (※그는 20대로 수습사원인 내게도 "아저씨"란 호칭을 썼었다.) "강남역에서 귀가하시는 광역 버스 타시려나 봐요. 한번 날 잡고 술 먹어요."


그렇게 우린 정확히 한 달 후 한 고깃집에서 만났다.




여기서 잠깐. 스무 살 터울인 나와 A 차장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1. 일반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90년에, 나는 2010년에.)


2. 어학연수 경험 덕분에 둘 다 나름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


3. 둘 다 문과생 출신이다. (※그는 영어영문학, 나는 정치외교학. 직장생활에선 별 의미없지만..)


그날 우리의 대화는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 가정, 육아 등의 평범한 주제였던 우리 대화는 어느새 무거워졌다.


"아저씨. 너나 나나 처음에 기업 입사했을 땐 꿈이 있었잖아." 그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 나, 말만 부장이지, 지금 현장에서 영업 뛰어. 기술 없고 자격증 없는 문과생 출신은 말이야. 말년이 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 되거든. '영업 뛰든가, 치킨집 차리든가.' 그나마 영업 뛸 수 있는 '자리'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뭐 전국에 문과생 출신이 세고 셌어? 나하고 아저씨만 영어 잘하나? 요즘은 다들 잘하지."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A 차장의 주름은 깊어만갔다. 그의 요지는 이랬다.


40대를 거쳐 50대가 되면 '영업'과 '인간관계'가 전부인 세상이 온다.


아직 대중에겐 피부로 와 닿지 않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할수록, 이과 출신 엔지니어와 과학자 같은 이들의 대우는 높아진다. 우리와 같은 문과생들의 선택의 폭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건 분명 사실이다.


나이 서른 넘은 문과생이 갑자기 엔지니어가 되긴 어려운 법이다.


그런 현실을, A 차장은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었다.


약 2시간의 저녁 식사에서 그는 스무 통이 넘는 영업 관련 전화를 받. 우리의 대화는 수도 없이 중단됐고, 재개되길 반복했.


전화 통화 엿들어보니, 대다수의 경 그 '을'에 가까웠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몸을 굽히는 게 그에게 일상이었다. 전화 통화 중인 그의 몸 이런 습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전화를 마친 A 차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30대인 아저씨는, 아직 기회가 있잖아. 대학원 다녀? 학위라도 있으면 좋고. 아니면 주말에 공부라도 해서 자격증이라도 따. 아저씨 미래가 내 지금 모습이면 안되잖아."


여기까지가 기억에 남는 A 차장과의 대화다.


A 차장과의 대화는 내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한때 부서를 주름잡던 A 차장의 패기는 온데간데 어졌다. 지금은 거래처에 쩔쩔매 체면을 구기는 말년 샐러리맨 뿐이었다.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면,  수많은 후배 문과생들이 진로를 위해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하는 정치외교학도 A 후배, 어문학을 전공했다가 업에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2년제 기술학교에 입학20대 후반 B 후배까지….


어쩌면 이런 시도들은, 문과의 한계를 일찌감치 가운데 기울이는 변화의 노력인 걸까.


불과 10년 전, 낭만적인 글 쓰는 걸 좋아하며, 풋풋한 에세이 는 걸 취미삼았던 문과생들의 현실은 경제 불황과 시대 변화 앞에 차갑게 고 있었다.


20대보다 변화의 기회가  큰 폭으로 줄어든 30대, 즉 나의 현실은 어떨 것인가. 이건 내게도 새로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0년 만에 마주한 그의 쓰라린 현실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 난 기꺼이 그날 소고기값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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