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2
일어나니 아침 10시쯤 됐다. 책상에는 밤에 먹은 클램차우더 그릇이 흩어져있었고, 그 앞에 의자에는 벗어던진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5cm 정도 열려있는 빈틈 사이로 빛이 세어 들어오는 암막커튼을 완전히 제쳐서 본 보스턴의 첫 모습은 흐렸다. 기분 탓인지 흐려도 우중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첫날의 설렘을 만끽하다 로비에서 사 온 커피와 오믈렛으로 간단하게 늦은 아침을 해결한 후 호텔을 나왔다. 오늘 갈 곳은 뉴베리 스트릿. 양쪽 길로 매장과 식당들이 늘어선 뉴베리 스트릿은 숙소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흐린 날씨 덕분에 양쪽 길에 늘어선 벽돌 건물들은 색이 더 선명해 보였다. 보스턴 특유의 분위기가 이 벽돌 건물들에서 나온다. 뉴욕과는 또 다른 느낌의 벽돌 건물들. 점잖으면서 따뜻한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아침에 급히 결정한 오늘의 외출지라, 그냥 책에 있는 약도를 보며 둘러보고 싶은 매장들을 표시했고, 표시된 곳들을 위주로 길 한쪽 끝에서 시작해 반대편까지 쭉 걸어갔다. 거리 초입에 있는 명품 매장들을 지나니 개인 갤러리도 있고, 반지하 카페도 많이 보였다. 평소에 좋아하는 브랜드 매장을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마음에 드는 지갑을 만지작 거리다 나오기도 하고. 특이한 파티 용품 가게도 구경하고, 유일한 오프라인 매장의 티셔츠 브랜드 매장도 들려서 기념으로 반팔티도 한 장 샀다. 그렇게 구경하면서 늦은 점심도 사 먹고 길의 끝까지 다 오니 한 서점 앞에 오게 됐다. 무조건 들어갔다. 여행 가면 그 동네의 유명한 독립서점 한 곳쯤은 꼭 가려고 한다.
Trident Booksellers and Cafe 라는 2층짜리 서점은 옆 건물들처럼 이 거리에 아주 잘 어울리는 벽돌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Trident’는 삼지창이라는 뜻으로 서점 창문 유리에는 삼지창 모양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에 붙여진 종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Love Books?”
1,2층으로 이루어진 서점은 책꽂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한정된 공간 안은 나름의 동선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1층 공간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책꽂이들 쭉 연결돼 공간과 공간을 분리하고 있었다. 책꽂이를 벽 삼아 왼쪽 공간은 카페였고 오른쪽은 서점이었다. 서점 공간의 오른쪽 벽 따라 자리 잡은 계단을 올라가면 2층도 책꽂이 벽으로 공간이 분리돼 있었다. 계단이 있는 공간은 서점, 책꽂이 벽 뒤쪽은 카페. 1층의 카페는 간단히 커피 마실 수 있는 작은 테이블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2층은 널찍한 테이블들이 많았으며 간단한 식사가 가능한 메뉴들이 있었다. 카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며 여기는 이름하여 ‘하고 싶은 거 다 해 서점’ 이구나 생각했다.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입구를 들어서면 누구나 접하기 쉬운 베스트셀러들과 잡지들이 꽂혀있는 책꽂이로 시작됐고, 첫 책꽂이를 지나니 그 뒤로는 소설과 수필들이 꽉 찬 길이었다. 많은 책을 둬야 하다 보니 책꽂이에 세로로 꽂힌 책 위에 또 다른 책들이 가로로 눕혀져 있기도 했고,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서점 안은 나름의 규칙으로 정돈돼있었다. 제목들을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제목이 있으면 책을 빼서 표지도 한번 만져보고 목차도 유심히 읽어보았다. 목차를 보는 건 내가 평소에 책을 고르는 방식 중 하나다. 좋아하는 작가라서, 아니면 정말 단순히 제목이 끌려서의 경우도 있겠지만 내 책들에는 목차 부분의 소제목들에 의해서 구매가 결정된 책들이 많다. 물론 그중 마음에 드는 소제목의 내용을 읽었을 때 그 내용이 공감되거나 재치 있게 느낀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다른 이야기들도 기대돼서 결국 그 책을 고르게 됐을 거다. 어차피 책은 읽어봐야 아는 것이니, 그렇게 부분만 읽고 마음에 들면 구매하는 것도 나에게 맞는 책 고르는 방법 중 하나다.
그렇게 1층에서 마음에 드는 책 두 권을 결제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서점에 처음에 들어섰을 때는 커피 향보다 책의 그 종이 냄새가 짙었는데 2층으로 올라오니 고소한 커피 향이 짙게 깔려 있었다. 책꽂이로 이루어진 벽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커피 한 잔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래층에서 산 책을 꺼내보며 기분 좋아했다. 난 신발보다 옷 사는 게 더 기분 좋고, 옷 사는 것만큼 책 사는 게 좋다. ‘아, 나 원래 책 참 좋아했었지, 맞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기도 했었지.’ 이런 생각은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했고 잊고 있던 내 꿈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적에 내 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마도 내 첫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