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3
전날 저녁에 도착해 자고 일어나서 맞이하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첫날은 일요일이다. 전날 이동하느라 피곤했는지, 이미 늦잠 자고 늦게 시작되는 첫날이니 다른 특별한 계획 없이 오늘은 천천히 나가서 다운타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조식 시간 30분 남겨놓고 호스텔 건물 2층의 공동공간인 부엌 겸 식당에 준비돼 있는 커피와 베이글로 아침을 해결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잠깐 누웠다. 느긋한 일요일을 보내고 있자니 몇 년 전, 나의 친구 샘이가 인도에서 보내온 엽서 내용이 떠올랐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누워 편지를 쓰는데 이 시간이면 항상 너와 함께인 수다 Time이 생각나고 그립기까지 해. 없는 동안 어메이징 한 너에게 또 얼마나 많은 일이 생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한 달 정도 인도 여행을 다녀오더니 한 달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며 다시 인도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하다가 인도로 영어 어학연수를 간 샘이는 인도에서 무려 6개월을 있었다. 그러고도 한국으로 돌아오기 아쉬워 아일랜드로 넘어가 어학연수를 연장했었다.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서로의 존재만 알다가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고3 때였다. 서로 학교도 다르고 사는 동네도 멀어서 평일에는 교류가 없었지만 우리는 매주 일요일이면 만나서 점심을 함께하며 그 길지 않은 시간을 꽉 채워 보냈었다. 늦은 점심을 시작으로 저녁시간 전까지 그 오후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이야기 나누며 일주일 간의 일상을 공유하는 건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스케줄이었다. 미드 ‘섹스 엔 더 시티’에서 캐리와 친구들이 주말마다 갖는 브런치 모임이 부럽지 않았다. 주중에 새로운 소식이나 고민이 생겨도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싶어서 일요일을 기다리곤 했었다. 시간을 함께 보내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낀 건 우리는 외향적인 부분도 많이 다른 만큼 내면적으로도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들에서 만큼은 잘 통했다. 분명히 동갑인데 차분한 성격에 어른스럽기까지 한 샘이는 내가 또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충전하는데 큰 역할을 해줬었다. 그 역할은 내가 재수하는 20살 때 더 큰 힘을 줬으며 그렇게 우리는 20살 때부터 매우 돈독한 친구 사이가 됐다. 교회에서 알게 됐지만 우리는 서로를 교회 친구라고 칭하진 않는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사소한 계기로 각별히 친해지기도 하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하는 다양한 친구 관계들을 겪으면서 친구여도 여느 사람 관계처럼 멀어지는 계기들이 생길 걸 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평생 보고 지내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드는 가운데 ‘가능’을 외치는 듯한 친구가 샘이다. 우리끼리 종종 하는 말인데, 할머니 돼서도 서로 챙겨주고 서로 놀아주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 얘기를 할 때면 머리가 회색빛이 돼서도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거울 셀카를 찍는 모습이 상상 가능한 친구다. 예나 지금이나 자주 보는 친구는 아니지만 그 거리가 마음의 거리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사이라는 믿음이 있다.
전혜린의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괴로워할 때 넌 나를 비웃지 않고 내가 기뻐할 때 넌 날 시기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많은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샘이다. 전혜린은 일기장을 대상으로 쓴 글이지만, 내가 일기장에 쓰듯이 속을 샅샅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인 것이다.
6년 전 여기 샌프란시스코도 함께 와서인지, 젊음을 잃지 말고 살자고 항상 상기시켜주고 응원해주는 친구 생각이 더 진하게 나는 일요일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