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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Feb 23. 2024

아이 친구, 엄마가 만들어줘야 할까

내가 어릴 적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 덕분에 집 겸 엄마의 영업장에는 동네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시 엄마가 운영하는 학원 안에는 우리 가족이 사는 단칸방과 부엌이 딸려 있었다. 요즘 젊은 분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90년대 초반 서민 동네에는 이런 형태의 가겟집들이 제법 있었다(88년 배경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의 주인공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의 구조가 당시 우리집 구조와 비슷했다). 학원에 오는 아이들은 나잇대도 다양하게 내 또래의 유치원생 아이들부터 초등 고학년 언니, 오빠들까지. 가끔 드물게 교복 입은 언니오빠들도 동네 사랑방처럼 우리 집에 들렀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자란 나는 사회성 좋은 인싸가 됐냐고? 천만에다. 매년 새학기는 어떻게 또 적응해야 할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다들 너무 쉽게 무리를 만들어 밥을 나눠먹고 화장실을 같이 가는 게 신기했다. 그 안에서 나는 물 위에 뜬 기름마냥 이질적으로 혼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센 애들한테 치이기도 일쑤였던 나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10대를 보냈다.


그 뒤로 엄마가 됐고 나는 아이가 다른 건 몰라도 사회성 만큼은 나를 닮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가 태어난 시기는 코로나가 한창 국내에 확산되던 시기. 전 국민이 '강제 집콕'을 해야 했다. 낯가리고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는 조리원조차 방으로 식사를 갖다 주는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조리원 동기도 없었다. 아기들의 필수코스라는 마트 문화센터도 열리는 족족 폐강됐다. 원래 친구도 별로 없지만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도 한 명 뿐이었다. 휴직 기간 14개월동안 그 친구를 만난 두어 번을 제외하고 우리 아이는 또래 아이를 만날 일이 전무하다시피했다.


그래도 어린이집에 보내면 자연스럽게 아는 엄마들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내향인인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스트레스로 다가오긴 했지만, 코로나 베이비인 아이의 사회성을 위해서는 싫더라도 어울리기로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웬걸, 일단 워킹맘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직접 등하원하는 날조차 손에 꼽혔다. 남편이 쉬는 날에 하거나 아니면 친정엄마, 등하원도우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직접 등원을 해도 마주치는 엄마들은 별로 없었고, 가뭄에 콩 나듯 다른 엄마와 마주쳐도 서로 눈인사 정도나 할 뿐 각자 바쁜 출근길을 재촉해야 하기에 무슨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워킹맘 육아의 고충 중 하나는 아이 친구 엄마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우리 때야 스스로 놀이터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은 엄마들이 미리 약속을 잡고 놀이터나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을 '놀리면서' 친분을 쌓고 상급 기관 진학 전 친구무리를 만드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아이가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하는 것 같으면 '내가 일을 해서 그런가...'하고 자책을 하는 워킹맘들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이 올까봐 꽤나 걱정이 됐었다. 특히 기관에 가기 전 우리 아이는 낯가림도 매우 심했고 아기 때는 분리불안도 있어서 내내 아기띠로 안고 다녀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전혀 어려움 없이 기관에 적응했고 등원 첫날부터 재원생에게 먼저 다가가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말이 트이고 나니 그의 '인싸 기질'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래 아이들이 보이면 "같이 미끄럼 타자!"고 자연스럽게 놀이를 청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을 수 있다는 게 내 입장에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가 친구를 만들어준 적 없어도 알아서 친구들을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친한 친구의 이름들을 집에 와서 이야기했고 무슨 놀이를 했는지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쉬는 날인 아이 아빠가 아이를 하원시켰는데, 퇴근하면서 아이 아빠에게 연락을 했더니 글쎄 다른 친구네 집에 엄마들과 다같이 놀러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엄마들일텐데 남편이 혹시나 민폐를 끼친 건 아닌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아이가 친구 집에 너무 가고싶다고 졸라서 안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다른 엄마들도 모두 기분 좋게 양해해 주셨고 이후로는 하원 후 종종 모여 놀게 됐다. 아무튼 아이는 그 날 이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헤어질 때마다 "00아, ㅁㅁ아! 우리 집에도 놀러와!"를 잊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 마음의(그리고 집 상태의) 준비가 안 됐는데..


친구를 너무 좋아라하는 아이 덕분에 나도 얼떨결에 다른 엄마들과 안면을 틀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준 게 아니라, 아는 엄마 한 명도 없는 '아싸'인 엄마에게 아이가 친구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처음으로 또래 아이의 엄마들을 알게 되면서 유치원 선택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물론 아이가 형성한 친구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은 최선을 다했다. 우리  부부 역시 근무 시간을 쪼개어 아이의 놀이터 시간에 가끔이라도 함께하고, 아이가 간식을 받아 오면 나도 비슷한 가격대의 무난한  간식을 준비해 친구들에게 돌리고, 아이와 친구들의 생일파티를 주최하고 참석하는 일 등이다. 

또 아이들 사이에 갈등을 최소화하고, 일어나더라도 합리적으로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양보하기, 차례 지키기, 자신의 욕구를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조율하는 방법을 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비록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완벽하지 않고 때론 친구들과 부딪힐 때도 있지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임을 잊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사회 관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가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기질이 가장 결정적이겠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태어나 가장 먼저 맺는 인간관계인 '부모와 아이'간의 애착 관계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회성 형성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 여러 연구 결과에서도 증명됐다.


코로나 없던 시절에 태어나 주변에 항상 또래 아이들이 많았던 나는 늘 위축돼 있었고, 부정적 자아상을 갖고 있었다. 가정불화가 심했고, 여러가지 이유로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다가 6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엄마가 돼 육아를 공부하다 보니 이러한 성장배경이 나의 불안이 높은 기질과 내향적인 성격을 부정적 방향으로 극대화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반면 코로나 베이비로 약 2년 동안 또래 아이를 거의 접하지 못하고 자란 우리 아이는 대체로 밝고 자신만만하다.

임신 때부터 애착 육아에 관심을 가져 온 나는 다소 힘들더라도 복직하기 전까지는 애착 형성을 최우선으로 삼으려 했다. 잘 우는 아기를 아기띠로 안고 모든 행동을 했고, 코로나 시국이기도 했지만 굳이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허락된 휴직 기간 내내 가정보육을 했다. 힘들어도 아기 앞에서는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러한 노력이 일부 영향을 줬는지 아이는 언제부턴가 분리불안과 낯가림을 조금씩 내려놓고 용감하게 사회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기질적인 요인도 컸지만, 설령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라도 사회성이 정상 범위라면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과 맞는 친구들을 만들며 잘 지내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당장 우리 아이의 친구들만 봐도 외향적인 아이, 내향적인 아이, 맞벌이 가정의 아이, 외벌이 가정의 아이 등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잘 지내고 있다. 자신의 타고난 기질대로.


아이의 마음 밭을 건강하게 가꿔 준다면, 어떤 친구를 얼마나 만들지는 아이를 믿고 맡겨 둬도 되지 않을까. 오늘도 아이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맞벌이 부모님들이 아이의 사회성 문제로 너무 죄책감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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