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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Feb 16. 2024

워킹맘이지만 안쓰럽지 않습니다

‘워킹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썩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항상 피로에 절어 있는 모습, 어딘가 쫓기는 모습,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죄인처럼 눈치를 살피는 모습, 혹은 지나치게 뻔뻔해서 여기저기에 민폐를 끼치는 모습 등...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워킹맘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나잇대가 좀 있는 분들은 “여자는 그저 돈 잘 버는 남자 만나서 예쁘게 살림만 하는 게 최곤데, 박복하다”고 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은 “저게 뭐야, 난 저렇게는 안 살 거야. 근데 경력단절 되기도 싫으니까 그냥 비혼, 비출산하고 말지”라고들 한다. 그나마 긍정적인 말이 “많이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애들 커서 좀 나아질 거야” 정도다.    

 

같은 말을 영유아 아이를 키우는 ‘워킹 대디’에게는 하지 않는다. 아빠가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어떤 토를 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냥 ‘가장의 무게’정도만 추상적으로 생각할 뿐 딱히 안쓰럽다거나 팔자가 사납다거나 장가를 잘못 갔다(?)고 하진 않는다.      


물론 저런 말들이 나오는 게 아예 근거가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실제로 남성보다 육체적으로 약하고, 임신 출산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몸으로서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직까지는 많은 직장들이 남성 중심적이고, 가족 친화적이지 못한 한국 기업의 특성상 워킹맘의 직장생활이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워킹맘 4년차인 나의 일상은 정말 고통스럽고, 불행하기만 할까? 솔직히 말해 복직 초기에는 그런 감정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업무에 적응이 어려웠고, 밤에 유독 자주 잠을 설치는 아이를 돌보니 비몽사몽한 상태로 출근을 해야 했다. 어린이집에 막 다니기 시작한 두세돌 무렵부터는 열이나 각종 바이러스 감염도 더 잦았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적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손도 많이 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언제까지나 아기가 아니었다. 많은 선배 워킹맘들이 신신당부했듯 언제까지나 아기일 줄로만 알았던 나의 아이도 어느새 어린이가 됐고 때론 나 없이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제법 대화다운 대화도 가능해졌다. 더 이상 워킹맘으로서의 내 삶이 마냥 불쌍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워킹맘의 삶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엄마는 일을 하든, 안 하든 가사일과 육아를 오롯이 혼자 담당할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엄마의 가사일 비중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집과 주변 맞벌이 가정들을 봐도 확실히 이전 세대에 비해서는 가사 분담이 잘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기관 등하원을 할 때도 아빠가 오는 가정이 흔해졌고 요리나 청소 등을 아빠가 주로 담당하는 부부도 많다. 평일 낮에 이뤄지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행사에도 엄마 대신 아빠가 오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우리 가정 역시 상대적으로 평일 낮에 시간이 좀 더 많은 남편이 등하원과 가사일을 하는 비중이 높다. 실제로 최근에는 근무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평일 낮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부모들도 많다. 부부가 함께 분담해서 가사와 육아를 하고 있으니 직장 동료들에게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민폐를 끼칠 일도 없다.      


우리는 시간이 될 때 서로 가사일과 육아와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누가 ‘주’가 된다는 의식 없이 신혼 때부터 그렇게 해 왔다.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우리 부부는 육아휴직 기간을 제외하면 내내 맞벌이를 하며 자산을 조금씩 형성하고 있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온 내가,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비로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게 때론 몹시 뿌듯하다.      


워킹맘으로서 살면서 무엇보다 좋은 점은, 행복과 성취감을 느낄 요소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결혼 전 직장 생활만을 할 때는 내 삶에서 직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는 됐던 것 같다. 물리적 시간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마음 속 중요도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업무가 잘 풀리지 않으면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회사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내 가정이라는 또 다른 축이 생긴 것이다. 직장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고 가정의 비중을 늘리면서,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가정에서 이를 회복할 수 있다. 비록 직장 일은 잘 풀리지 않았지만 내 아이가 새로운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든가, 어린이집에서 칭찬을 받았거나, 엄마에게 애정 표현을 퍼부으면 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이 찾아온다. 반면 육아가 맘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부여된 책무가 있기 때문에 내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올해 세는 나이로 5살인 우리 아이는 종종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회사 다니고 싶어"라고 한다. 솔직히 직장 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니 나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책임의 무게도 크지만 그만큼 존재를 인정받는 즐거움도 크다.

 

영유아 키우는 워킹맘의 좋은 점을 푼수처럼 나열해봤다. 자기 자랑을 참 좋아하지 않지만, 워킹맘이라는 단어만 검색하면 (비록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라도)온통 우울하고 힘든 이야기만 나오는 마당에, ‘그래도 애들 키우면 학원비 벌 수 있어서 좋다’말고 다른 장점을 듣고 싶은 분들도 있을 듯해 몇 자 적어보았다. 저출산 해결에 0.01%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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