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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할 성은 Sep 03. 2024

신이 머물다 간 순간

살라고, 살아보라고.


1990년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2.9kg의 튼튼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질이 급했는지 출산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빨리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1시간 만에 순풍 나온 순둥한 아기였다. 아기의 아빠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장에 가면 딸내미지만 장군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에게 장군감이라고 하다니, 아기의 아빠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건강해 보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기는 넓은 평야 비옥한 땅의 팔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곡식이 익는 가을날에 태어나 먹을 복이 많다고 했다. 문제없이 무럭무럭 자랄 줄 알았던 아기는 4살 무렵 큰 사고를 당했다. 강원도 대관령에서였다.


1993년 겨울, 강원도 대관령. 봉고라고 불리던 승합차를 타고 3명의 가족이 여행을 다녀오고 있었다. 그날따라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던지. 도로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구불구불한 대관령 고개는 더욱 위태로웠다. 속도를 줄이며 조심조심 대관령 고개를 넘던 봉고 안에서 아이의 엄마는 순간적으로 사고를 직감했다. '무사하게 해 주세요.' 아이 엄마의 한 마디 화살기도를 끝으로 봉고는 대관령 고개에서 미끄러져 굴렀다. 사고 순간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가 눈을 떴다. 오른쪽 창문 밖에 주황색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차 문을 따고 있다. 아이는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길 아래로는 낭떠러지인 대관령 고개, 심지어 눈이 내려 꽁꽁 얼어붙은 그 길 위를 몇 바퀴 구른 승합차 사고에서 사람이 생존할 확률이 몇 퍼센트일까. 아이 엄마의 간절한 화살기도 덕분인지 3명 모두 기적적으로 살았다. 아이의 아빠는 손등이 부러져 수술을 했고, 아이의 엄마는 허리를 다쳤고, 아이는 오른쪽 다리에 금이 갔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천운이었다.


1993년 겨울 대관령 사고가 아이의 기억 속에서 무뎌질 때쯤이었다.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한 2000년, 어느새 11살이 된 아이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동네 가정의학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감기 같다며 해열제랑 감기약을 처방했다. 오렌지맛이 나던 부루펜과 체리맛이 나던 타이레놀 시럽으로 아이의 열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고열은 지독히도 오래갔다. 열과 함께 두통과 구토 증상까지 생긴 아이는 축 쳐지기만 했다. 아이의 엄마 아빠는 아이를 업고 용산구의 어린이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이 병원에서도 아이의 증상을 심한 감기로 진단하고 증상이 계속되면 대학 병원으로 가라고 할 뿐이었다. 몇 봉지의 약만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부터였나. 아이는 엄마를 붙잡고 왼쪽 눈이 너무 아프다고 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왼쪽 눈은 뜰 수 없을 정도로 눈꺼풀이 붙어버렸다.


아이와 아이의 부모는 놀란 마음을 붙잡고 곧장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를 응급실 침대에 눕히고 의사에게 횡설수설 아이의 증상을 얘기했다. 열과 두통, 구토, 복통 그리고 왼쪽 눈의 통증을 호소하며 뜨지 못한다고 말이다. 아이가 복통이 있다는 말에 의사는 맹장염이 의심된다며 수술을 할 수도 있으니 금식을 하라고 했다. 아픈 아이는 침대 왼쪽으로 누워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눈앞에 시계는 오후 2시 35분을 가리키며 멈췄다. 강한 줄만 알았던 아이의 아빠는 처음으로 주저앉았다.


아이가 눈을 떴다. 아이의 눈앞에는 엄마와 아빠 친척들까지 모여 있었다. 아이의 코에는 초록색 산소호흡기가 끼워져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시곗바늘은 밤 10시를 넘겼다. 의식을 잃은 지 8시간 만에 아이가 깨어난 것이다. 아이의 기억에 없는 8시간 동안 모든 검사가 진행되었다. 새우등을 하고 허리에 바늘을 찔러 척수액을 뽑는 척수 검사 결과, 아이는 세균성 뇌수막염이었다. 감기라고, 심한 감기라고, 맹장염이라고 했던 것은 모두 오진이었다. 아이를 괴롭히던 진짜 존재는 치사율 10%에 달하는 세균성 뇌수막염이었다. 무균성 뇌수막염,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은 종종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세균성 뇌수막염은 발생률조차 낮은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아이에게는 2주 넘게 고용량의 항생제 처방과 각종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딱 붙어버려서 떠지지 않는 왼쪽 눈을 보며 세수를 하고, 매일 열을 내리고자 얼음 베개를 베고 잤다. 아이의 엄마는 침대에만 누워있는 딸이 심심할까 싶어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 계보에 음을 넣어 불러줬다. 입원 중에 어린이날이 있던지라 아이는 병실에 켜진 TV 속 어린이날 행사 프로그램을 보며 부러워했고, 담당 레지던트 의사에게 예쁜 나비 머리핀을 선물 받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세균성 뇌수막염이 완치되었는지 보려면 척수 검사를 또 받아야 했다. 허리에 바늘을 찌르는 것도 무섭지만 검사 후 4시간이나 꼼짝없이 한 자세로 누워있어야 하는 것을 아이는 더 두려워했다. 하지만 순둥하고도 장군감이었던 아이였으니 잘 버텨냈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아이가 아픈 지 한 달도 더 된 날이었다. 세균성 뇌수막염은 언어 장애 등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고 하나 아이는 후유증 없이 모든 것을 잘 극복했다. 또 한 번의 천운이었다.


두 번의 구사일생을 겪은 아이는 열심히 잘 살아서 30대의 어른이 되었다. 살라고, 살아보라고 하늘이 준 인생의 기회를 매일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나에게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의 이야기다.


어쩌면 그때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을 수 있는 내 인생은 기적처럼 일어서고 또 우뚝 일어섰다. 30대가 된 지금은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 세 번째 캐릭터를 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님 시즌 3이라고 해야 할까. 소중한 인생에서 느끼는 감정과 추억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봐 오늘도 기록한다.


혹시 힘들다면, 기억하자.

모든 사람에게는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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