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니오 노멜리니
집중된 시선 속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리더의 무게란 바로 이런 것이겠죠. _<매일 그림 날마다 여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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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술 기법, 역사적 배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하루키의 감각과 추상표현으로 쓴 감상입니다.)
+ 하루키 감상
플리니오 노멜리니는 1899년 그리젤다 치우치Griselda Ciucci와 결혼해 1902년 제노바에서 토레 델 라고로 이사를 합니다. 가장 먼저 (이사한 집에) 초대한 친구는 자코모 푸치니(오페라 작곡가). 새 집을 구경시키고,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자리를 옮기자 푸치니는 감사를 표하고자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아 쇼팽의 에튀드 Op. 10 No.1 폭포(waterfall)를 연주합니다.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이 어느새 절정에 치닫고, 코다Coda(악보의 마지막 부분)를 끝으로 연주가 끝납니다. 노멜리니 부부는 기립 박수를 칩니다.
그리젤다는 영국식 홍차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노멜리니는 그리젤다가 자리를 비우자 갑자기 한숨을 쉽니다. 푸치니와 눈이 마주친 노멜리니. 입을 엽니다.
"나는 쇼팽의 음악을 들으면, 영웅이 생각나. 쇼팽의 음악에는 고국 폴란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폴란드를 침략한 러시아에 대한 분노, 구원이 담겨있지"
푸치니는 말합니다.
"그런가? 나는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감성적이란 생각을 하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지"
노멜리니는 양손을 꽉 쥐며 잠시 침묵했고, 갑작스럽게 말문이 엽니다.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이 보고 싶네. 현재의 이탈리아는 혼란스럽고, 다양한 이념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있어. 극심한 빈부 격차는 괴물을 탄생시킬 거야.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에서도 괴물이 탄생할 거야. 괴물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전쟁의 광풍으로 휩쓸거야"
*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자 혁명가, 군인, 정치인.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와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 3걸로 꼽힌다. (중략) 가리발디의 업적은 통일의 최대 난적 중 하나였던 양 시칠리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조건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양도한 것이다. (중략) 가리발디는 공화주의적이고 내셔널리스트적인 좌파에 가까웠다. _나무위키
노멜리니의 말을 듣고 있던 푸치니는 눈썹과 입꼬리를 동시에 올리며 말합니다.
"내가 20대 때 (1880년대) 피렌체 외곽에서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과 붉은 셔츠단을 가까이 본 적 있지. 보통 장군하면 백마를 타고 셀 수 없을 만큼의 훈장을 달고,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깔끔한 제복을 입는데. 그는 아니었어.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남루한 옷과 흑마를 타고 있었지. 하지만, 신비함과 충만함이 가득한 오오라가 느껴졌어.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그를 둘러싼 20대 초반의 붉은 셔츠 군인들이 한 목소리로 크게 대답을 했지. 베토벤의 '합창' 같았어.
갑자기 11살? 12살쯤 돼 보이는 소년 병사가 뛰쳐나와 나팔을 부는 거야. 붉은 셔츠 군대는 입을 모아 국가를 부르고, 어느새 나도 따라 불렀어. 국가가 끝나자 소리를 질렀어. 가리발디 장군 만세! 이탈리아 만세!"
노멜리니는 피가 끓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고맙네 친구. 당신과 이탈리아를 위한 그림을 그려야겠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점묘법*으로 그릴 거거든." 5년 후 1907년 <가리발디>를 완성합니다.
* 점 또는 점에 가까운 가벼운 필촉(筆觸)으로 그리는 회화의 한 기법. 신인상파의 화가 쇠라(G.P. Seurat) 등이 인상파 이론을 과학적으로 구명하고 사용한 채색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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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걸음 떨어져 서서
붉은 물결이 보입니다.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을 중심으로 붉은 지평선은 점점 커집니다. 옆과 앞을 둘러싸며. 언뜻 성경의 모세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붉은 지평선 위로는 회색빛, 붉은 지평선 아래로는 은은한 오렌지빛을 띱니다.
2. 5걸음 떨어져 서서
붉은 물결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들. 흑마를 타고 있는 노인이 보였고, 그의 머리 위로는 하늘이 보입니다. 그와 가까운 곳은 밝고, 그와 떨어진 곳은 어슴푸레합니다. 그와 흑마가 딛고 있는 땅은, 억새 들판입니다.
3. 1걸음 떨어져 서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청년들. 그들은 그 유명한 가리발디 장군의 정예 부대 '붉은 셔츠단'. 흑마를 타고 위엄 있게 제군을 바라보는 가리발디 장군. 그 아래 승리의 나팔을 부는 소년 병사. 하늘은 가리발디에게 경의를 표하고, 들판의 억새들은 몸을 눕혀 존경을 표합니다. 은은한 빛깔은 영적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4. 노벨리니는 자신이 그린 <가리발디>를 관객이 거리에 따라 상징과 알레고리*를 느끼게 완성합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귓가에 군인들의 합창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 추상적, 금기적, 종교적인 개념이나 사상을 비유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암시하는 표현 방식
* 화가 - 플리니오 노멜리니Plinio Nomellini (1866 ~ 1943, 이탈리아)
+ 전기(1866-1890)
플리니오 노멜리니는 1866년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보입니다. 1885년,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 스타일의 중심인물인 조반니 파토리Giovanni Fattori가 그의 스승입니다.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 스타일은 빛과 색의 표현에 중점을 둔 이탈리아 인상주의 화풍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보다 앞서 빛과 색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888년, 노멜리니는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작품들은 마키아이올리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풍경화와 농촌 생활이 주제였습니다.
+ 중기(1891-1910)
1891년부터 노멜리니의 화풍에 변화가 생깁니다. 점점 상징주의와 분할주의(Divisionism)* 기법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1894년, 밀라노에서 열린 트리엔날레 전시회에 참가하여 큰 주목을 받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에서 빛의 표현이 더욱 중요해지며, 색채의 사용도 대담해집니다.
* 분할주의(점묘법) 광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개별 점이나 패치로 색상을 분리하는 것으로, 신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적 스타일
+ 후기(1911-1943)
1911년 이후에는 벽화 작업과 같은 대형 작품에도 도전합니다. 1919년, 노멜리니는 피렌체로 이주해 작업실을 마련했고, 활발한 창작 활동과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멜리니는 추상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내면의 감정과 영적인 세계를 표현합니다.
193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해 생애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 1943년 77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사망합니다.
+ 비평적 관점
일부 비평가들은 노멜리니의 그림 스타일이 너무 자주 변한다고 지적합니다. 초기 마키아이올리 스타일부터 후기의 상징주의와 분할주의까지, 그의 화풍 변화가 급격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로 인해 작가로서의 일관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또한, 그림 기법이 때로는 서툴고 미숙하다 평가합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추상적 표현에 대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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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특징
1.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조화
노멜리니 초기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처럼 빛과 색채의 변화를 탐구했습니다. 자연광 속에서 풍경을 그리며,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주제는 주로 토스카나 지방의 풍경과 일상입니다. 매우 세밀한 묘사를 통해 현실을 생생히 재현합니다. 인물의 표정이나 자연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2. 상징주의와 분할주의(점묘법)의 융합
1900년대 들어서면서 노멜리니는 더 깊은 주제의식과 실험을 보여줍니다. 당시 노멜리니는 이탈리아의 독립운동과 노동자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상징주의와 분할주의(점묘법)를 조합해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는 이에게 깊은 사색을 유도합니다.
3. 표현주의
말년에는 예술적 탐구의 정점을 이루며, 내면적이고 자연과 인간관계를 깊이 탐구합니다. 노멜리니는 빛과 색을 통해 시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한편 색과 형태를 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현대 회화의 선구자란 평가도 받습니다.
+ 의식 안의 미술관
아직 노멜리니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자료를 통해 본 그의 작품들은 신화적 요소나 상징적인 느낌. 때때로 당시 이탈리아 시골의 농촌 풍경. 상당히 매력적인 화가 같습니다.
"엘링턴은 차이콥스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 인간도 재즈 과였어." _1일 1클래식
스윙 재즈를 대표하는, 50여 년 간 빅밴드 리더였던 듀크 앨링턴. 겨울은 특히 차이코프스키와 어울린다. 재즈 감성의 차이코프스키-겨울 완벽한 쌍을 이룬다. _하루키
The Nutcracker Suite(1960년)은 엘링턴과 그의 친구 뮤지션 빌리 스트레이혼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재즈적으로 편곡해 자신의 빅밴드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라 합니다. 전반적으로 원곡보다는 빠른 템포로 연주되는데 특히 트랙 Sugar Rum Cherry(매화 요정의 춤) 와 Arabesque Cookie(아라비안 댄스)의 연주를 주목해서 들으며 재즈 연주를 배경으로 하는 호두까기 인형을 발레 버전 _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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