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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락Oazzang철유 Oct 26. 2023

21. 부린이에서 1년 만에 중개법인 대표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건설 현장의 현장소장으로 25년을 일 했습니다.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서, 수많은 노무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며칠 밤을 꼬박 새며 피를 말리는 긴장감으로 그 세월을 보냈습니다. 

 

1987년부터 시작했으니 한참 대한민국이 발전하던 때였습니다, 대우자동차 전시장부터 시작하여 삼성동의 코엑스가 전시 문화를 시작하던 때 매일 밤 새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일 했습니다. 

 

토, 일요일 휴일이 아니었고 일요일 포함 일주일 내내 새벽에 퇴근하며 일 했습니다. 그 당시에 건축 일을 한 분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면서 나름 뿌듯함도 많이 느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 하고 1990년 대부터 2000년 대까지 대한민국의 건설 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하던 때였고 거기에  저의 힘을 보탰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1990년 대 말에 피자헛 본사에서 직접 건축과 인테리어를 배우기 위해 본사가 있는 미국 위치타에서 1달 정도 연수를 하였습니다. 

2000년 대 초반에는 미국 뉴욕에서 1년 동안 건축 설계 회사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1호점 공사를 많이 했습니다. 

피자헛 1호점, 현대백화전 1호점, 애경백화점 1호점, 홈플러스 1호점, 삼성플라자 1호점, 메가박스 1호점 등. 

 

이 기회들이 저에게 상권분석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었습니다. 공인중개사로 일하면서 생각해보니 상권분석에 정말 좋은 경력이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가 2010년 가족이 살고 있던 호주로 이민 가려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민 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단계이자 요식적인 건강 검진을 한국에서 받아 그 결과를 호주에 보내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하게 호주 의사가 폐에 뭔가 있는 것 같으니 CT를 찍어 다시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만해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담배는 평생 피우지 않았고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폐결핵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에서의 최종 진단은 폐암 1기였습니다. 

 

다행히 1기에 발견되어 수요일 수술을 하고 금요일 퇴원했습니다. 

하지만 혈액 검사 시 발견된 암세포 한 개 때문에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술보다 저에게는 항암 치료가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이 모든 치료 과정을 무사히 마쳤으나 그동안 준비하던 호주 이민은 포기하였고 당장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지가 막막했습니다. 전과 같은 건축 현장소장이나 PM으로 일하기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이상 무리였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45살. 2012년이었는 데 그때 마침 외국인 도시 민박업이 생겼고 정부에서 게스트 하우스 개업을 장려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펑크록을 좋아해서 몇 십 년째 크라잉넛이나 노브레인의 친구였고 홍대 펑크 밴드 모두를 알고 있었기에 게스트 하우스 운영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하였던 8년 동안 행복했습니다. 

 

저의 행복이 고스란히 게스트들에게도 전달되었는 지 거의 모든 게스트들이 10점 만점의 후기를 써줬고 그래서 트립어드바이저의 700여개의 서울 전체 게스트 하우스 중 언제나 3위 안에 들었습니다. 

AirBnb의 슈퍼 호스트는 제도가 생긴 이 후부터 한번도 탈락되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모두 저의 소중한 게스트들의 힘이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보람찼던 일은 개업한 지 1년 만에 서울시에서 호스트를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강의를 하게 해줘서 폐업할 때까지 서울시, 문화관광부, 구청 등의 지자체 에서 강의를 해 달라고 해서 호스트를 하려는 분들에게 계속 강의를 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벤트처럼 한번 불러 줬었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폐업하기 전까지 몇 년을 계속 호스트를 하고 싶어하는 청중들 앞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다가 코로나를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워낙 알려졌고 계속 정부가 주최하는 강의를 하였기에 법대로 한국인 손님은 한 명도 안 받고 외국인만 받으며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였습니다. 

 

코로나로 모든 해외 여행길이 막히니 게스트 하우스는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손님이 몇 달 동안 한 사람도 없어 아쉽게 2021년 8월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를 폐업하게 됩니다. 개업한 지 딱 8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폐업 후 홍대에서 신나게 몇 년 놀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건축 회사 다닐 때 직장 후배가 연락이 왔습니다. 

 

형님, 제가 홍대에 부동산 사무실을 오픈했는데 노느니 나와서 계시죠.” 

 

이런 제안을 하였고 

그래, 노느니 후배 사무실에서 놀자.’ 

 

이런 마음에 출근을 하였습니다. 후배는 부동산 회사의 대표이지만 개업한 지 두 달 밖에 안된 상태였고 저는 그 당시 부동산의 부자도 관심이 없던 때였습니다. 

 

저도 고객들에게 관심도 못 받는 신세였습니다. 

당연한 것이 저는 그때 공인중개사도 아니고 중개보조원이었습니다. 

항상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다가 가장 말단이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중개보조원의 역할은 저에게 힘 들었습니다.

 

한 달쯤 다니다 안 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는 직군이라면 아예 집에서 쉬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대 역 대로변의 500억 대 건물들은 도대체 누가 중개하는 걸까?’ 

 

후배에게 물어보니 공인중개사 자격증만 있으면 중개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저는 

그럼 너는 빌딩 매매 중개를 해야지. 왜 이러고 있었어?” 

 

그날부터 전 그 당시 있던 회사가 빌딩 매매 중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고 스스로 방법을 금방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한낱 중개보조원이었습니다. 

 

현행법 상 중개보조원은 아무것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물건지의 문이나 열어주고 손님들이 사무실에 오면 커피나 타 줘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부동산 유튜브도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부동산 유튜브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사무실을 바로 그만두고 4개월 밖에 안 남은 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에 매진하였습니다. 진짜 미친 듯 공부하였습니다. 

 

혹자는 공인중개사 시험은 쉬워서 아무나 따는 것 아니냐 라고도 하지만 만만하게 볼 시험이 아닙니다. 

 

매년 40만 명이 시험을 봐서 4만 명쯤 합격하는 시험이니 나머지 36만 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문제를 계속 꼬아서 냅니다. 

80문제를 100분 안에 풀어야 하니 다섯 개의 지문을 다 읽기도 정신없는 시간입니다.

 

제가 그렇게 간절하게 합격을 원하고 미친 듯 시험 공부를 했던 이유는 자격증 합격 후의 밝은 길이 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격증이나 따볼까 하는 마음으로는 절대 1, 2차 동시, 초시 합격을 4개월 만에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합격을 하자마자 3주 만인 2021년 12월 28일 홍대에 빌딩인 부동산 중개법인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때 제 나이 54살 이었습니다. 굳이 제 나이를 밝히는 이유는 나이 드신 분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제가 부린이에서 1년 만에 부동산의 전문가로 성공한 이유는 첫째는 25년의 건축 경력입니다. 

 

저는 땅만 보면 건물만 보면 자동적으로 머리 속에 예상 경비, 공사 기간, 어떤 식으로 개발해야 할 지가 계산됩니다. 

 

다른 공인중개사보다 건축이나 개발 쪽으로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저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상권 분석도 오랜 사회경험과 건축경력으로 자연스럽게 전문가의 식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쓰고 싶은 분야인데 우연히 시작하여 10 여년 이상을 연구하였던 진화심리학도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나이입니다. 제 나이 54살에 처음 중개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초등학생때는 박정희 정권이었고 그 이후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정권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부동산의 역사나 뒷이야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동산은 무엇보다 정권과 정책에 민감함으로 오히려 공인중개사의 나이 듦이 더 유리할 때가 있습니다. 

 

20대 30대 젊은이들에게 본인의 전 재산이 걸린 건물 매매를 맡기기에는 좀 불안 할 것입니다. 

세월의 힘을 가진 조금은 나이가 있고 안정적인 공인중개사가 고객의 신임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1년 만에 중개법인의 대표가 되었고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배우고 계속 가르치며 대한민국 중개업의 기준을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건축 일을 할 때 항상 1호점을 공사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1호 공인중개사 슈퍼스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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