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vs 실리

#국제관계, #정치, #정의

by 케이엘

국제정치의 흐름을 살펴보면, 과거와 비교해 오늘날의 가장 큰 변화는 ‘정의’라는 명분이 약해지고 ‘실리’가 훨씬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냉전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개입은 ‘공격받은 주권국 방어’라는 명분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국은 아시아의 “자유 수호”를 앞세웠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국익과 세력권 유지라는 현실적 계산이 숨어 있었지만, 최소한 ‘정의’라는 외피는 필요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정치는 그 피상적인 '정의'라는 의미마저 퇴색되고 있습니다. 르완다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1994년 대량학살의 피해자였던 르완다는 국제사회의 동정을 받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콩고 동부에서 반군을 지원하며 막대한 광물 자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출발했으나 이제는 가해자로 지목되는 모호한 상황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유엔조차 르완다군이 직접 전투에 개입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할 정도이며, 콩고 측은 르완다가 학살의 기억을 국제 협상 카드로 활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광물 약탈에 집중한다고 비난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경우이자, 나아가 국제정치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 자체가 흐려진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역시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홀로코스트와 박해로 고통받았던 유대인의 피해사에서 출발했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과 군사작전을 통해 가해자로 불리며 비판을 받습니다. 팔레스타인 측도 민족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테러와 무력 공격으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가해자로 비판받습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정의를 가려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러시아는 명백히 침략자이지만, 국제사회는 피해자인 우크라이나를 ‘정의’라는 명분 아래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방은 무기와 자금은 제공하지만 병력은 보내지 않으며, 협상에서는 러시아의 이해가 반영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책임이 분명한 가해자 러시아는 여전히 협상 주체로 대우받고, 피해자인 우크라이나는 실질적 고립을 겪습니다. 정의보다 실리가 국제관계를 규정하기에, 피해자라는 사실만으로 국제정치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국제정치학적으로 보면, 과거의 ‘자유주의적 담론’과 오늘날의 ‘현실주의적 질서’의 대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국제정치는 집단안보와 국제기구를 통한 정의 실현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강대국들은 실리 추구를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도덕적 명분을 강조하기보다는 자국의 국익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제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행위는 무엇이 자국의 이익에 합하는가 하는 현실적 결과로 평가됩니다.


결국 오늘날 국제정치의 법칙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철저히 자국의 이익이라는 면에서 결정됩니다. 피해자였던 르완다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의 기억이 외교적 레버리지로 이용되며, 정의가 아닌 자원과 국익이 협상의 본질을 좌우하는 현실은 국제관계의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마저 흐려진 지금, 국제질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도덕이나 원칙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드러난 국가의 계산된 실리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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