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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May 05. 2023

울고 먹고만 반복하며
인생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04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열 달을 뱃속에 품고 있었어도 발바닥에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아기의 존재가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기를 낳자마자 아기를 먹이는 일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울고 또 먹고, 그것이 인생의 시작인가보다 하였다.


10년 후의 걱정까지 미리 가져와서 끙끙대는 성격인데도 출산 후에는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일시적으로나마) 긍정적이고 차분해졌다. 낳아 놓으면 다 알아서 큰다는 말을 정말 믿었던 것인지 어땠는지 그때는 정말 '어떻게 잘 되겠지'하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엄마 세대와는 달리 산후 조리도 모유 수유도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곳도 있으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모유가 더 좋다 

분유가 더 좋다


이 논쟁은 반복되어 온 육아계의 오랜 이슈인 듯했다. (나의 입장은 각자 형편에 맞게 먹이자는 것이다) 내가 첫 아이를 출산할 때는 모유가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육아에 대해 어떠한 사전지식도, 비결도 없었던 나는 산부인과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가르쳐 주는 것에 많이 의존하였다. 내가 이용했던 조리원은 '마미 캠프'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유 수유를 잘 가르쳐 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조리원에서 모유 수유를 잘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잘 가르쳐 주시기는 했지만, 아직 배 속에 아기가 그대로 있는 듯 내 몸은 무거웠고, 아픈 몸에 아기를 안고 '모유를 먹이는 모범 자세'를 잡기는 더 어려웠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요령도 늘지 않는 내 모습에 주눅이 들면서 어딘가 모자란 엄마 같아 눈치가 보일 때도 있었다.



모유 수유는 출산하면 저절로 되는 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떤 엄마는 모유가 잘 나와도 빠는 힘이 부족해 잘 못 먹는 아기가 안타까워 울고, 그 옆의 나는 반대의 이유로 울었다. 모유량이 많아 다른 아기에게 나눠주는 엄마도 있었으니, 사람마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엄마와 아기 모두에게 익숙해질 시간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수유를 한 번 하고 나면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와 몸과 마음이 녹다운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기가 배고파 울면 몸이 먼저 긴장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양이 부족해 아기가 배고파하는 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매사 무던하게 대처하는 초산이 아닌 엄마들과 넉넉히 아기를 먹이는 엄마들 사이에서, 내 아이 하나 배불리 못 먹이는 신세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분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힘들기만 하니 모유 수유를 포기하고 싶었다.


분유로 보충하긴 했다. 그러나 먹이고 나서 아기에게 두드러기가 자꾸 생겨 분유를 포기하고 모유를 주식으로 먹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모유량을 늘이려고 틈만 나면 두유와 미역국을 욱여넣다시피 먹었다. 그런데도 모유량은 극적으로 늘지 않았고 내 눈물만 점점 많아졌다. 애써 유축해서 모은 모유에 아기가 빠는 힘이 강해 생긴 상처에서 난 피가 섞여, 못 먹이고 버려야 하는 일도 잦았다. 젖몸살에, 배고픈 아기의 울음에 어쩔 줄을 몰라 땀과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이 아까운 눈물, 그냥 이게 젖이 되었으면 너도 배부르고 나도 좋았을 텐데. 나도 아기와 함께 '울고 먹고'만 반복하며 인생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조리원에서는 밥해 먹고 빨래하는 걱정은 안 했는데 집에선 모두 내 몫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직장인 당진에 미리 올라가 있었고, 이사 날짜가 뒤늦게 확정되어 산후도우미를 신청하지도 못했으며, 당시 외할머니가 위독하셨기 때문에 가까이 살던 친정엄마나 이모에게 의지할 상황이 못 되었다. 누군가 좀 도와주었으면 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혼자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아기를 보고 있으면 슬퍼졌다.


슬픈 것들은 모두 물과 관련 있어서, 젊은 날 헤맸던 바닷가를 나는 자주 떠올렸다. 울다, 울다 내 속에도 바다가 고였던지 거기서 자라난 아기를 낳았다. 또 울다, 울다 눈물의 강에 빠져 아기를 안고 강을 거꾸로 헤엄쳐 올라가느라고 이렇게 기운이 빠지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연어는 고향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나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할머니의 얼굴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내 품속의 아기처럼 나도 아이로 다시 돌아가서 바로잡고 싶은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밤, 아기의 맑고 검은 눈은 잠들 줄 몰랐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앞뒤 없는 생각들만 내 속에 차올랐다. 


출산 한 달 후, 당진으로 이사 와서도 여전히 아기를 먹이기에 바빴다. 먹일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수유 시간이 다가오면 지레 겁부터 났다. 아무래도 계속 이렇게 아프면 먹일 수가 없을 것 같아 병원에 가보았더니 유선이 다 곪아 있다고 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말 아플 만해서 아픈 것이었다. 처음 모유 수유를 할 땐 아플 수 있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먹여야 하는데 그때마다 아프다면 세상에 수유할 엄마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병원에서 설명해 주어서 짐을 덜었다. 부담감과 책임감만 가득했던 나에게는 최고의 위로였다.


아이를 먹이는 일을 벅차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다른 아이도 아니고 내 아이를 먹이는 일을 버거워한다는 것을 어디 털어놓기도 어려워 외롭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나와 함께 아픔의 강을 헤엄쳐 온 아이들이 무엇보다 건강하게 잘 커 준듯하여 고맙다. 이렇게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니 아이를 먹이며 흘린 눈물의 강을 어느 정도 지나온 것 같기도 하다. 혼자인 줄 알았지만, 함께였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아이들도 자라고 나도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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