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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Apr 28. 2023

온기를 전하는 비법

02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나는 늘 바다가 좋았다. 지금도 가슴이 답답한 날이면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특히 밤바다에 가서 '야!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하고 외치고 오면 그 바다는 나의 대나무 숲이 되었다.


바다에도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다. 또 살아남은 존재의 매일의 삶이 있으니까 사람 사는 세상을 많이 닮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인생은 끝없는 항해라고 했었지. 망망한 바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는지 모를 때도 있으니, 인생은 항해라는 그 말이 꼭 맞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그 '바다'에서 헤매는 날이 많았다. 방향도 잃었거니와 뱃멀미도 심했다. 가끔은 바다에 그냥 빠져 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최소한 눈물은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이 바다, 저 바다를 맨발로 서성거렸다.


하지만 살아야지, 내가 살아야지. 할머니가 정성으로 키운 삶인데
힘을 내고 살아서 내 인생을 꽃피워야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씩씩하게 지내려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매일의 규칙적인 일과들이 나를 상실감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별이 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모여 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그곳에 내가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어서, 문 앞까지라도 가서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오고 싶어서 새벽까지 일을 하는 날이면 키보드에 얼굴을 묻고 나는 자주 울었다.


그렇게 울며 보낸 새벽이 지나고 맞이하는 아침은 유난히 더 추워서 몸을 웅크리게 된다. 겨울이면 방이 식을까 항상 도톰한 솜이불이 깔려 있던 고향 집의 방이 떠올랐다. 웃풍이 심했던 주택이라 우리가 씻고 나면 추울까 봐 할머니는 솜이불 밑에 갈아입을 내복을 미리 묻어두셨다. 아니나 다를까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내복을 입으면 감은 머리카락이 덜 말라도 춥지 않았다. 도라에몽 주머니 마냥 그 이불 밑에서는 따뜻한 내복도 나왔고, 식혜도 나왔고, 삼각형 비닐 팩에 든 우유도 나왔으니 어린 시절의 겨울은 항상 온기가 가득했었다. 울다 맞이한 아침이면 그때 생각이 나서 나도 슬그머니 옷을 이불 밑으로 넣어 놓아 보기도 했다.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어른이 되어 할머니께 자랑하고 싶었지만, 나는 학교 졸업 후 교통사고를 당하여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동기들이 다들 자신의 길을 찾아 분주할 때 나는 긴 치료와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경에 손상을 입었으리라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이 아프고 퉁퉁 붓기 일쑤여서 일상생활이 어려웠는데,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 어른들은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이 놀고 있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 대한 아쉬움보다도 부모님 얼굴을 보기가 더 미안했다. 방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주변 사람들과도 자연히 멀어졌고, 세상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무력하게 누워있을 때면 항상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도 혼자 방에 누워있으면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꿈에서라도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런 행운도 내게는 많지 않았다. 어느 날 꿈속의 나는 도시락을 집에 두고 간 초등학생이었고, 할머니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까지 와서 아무 말도 없이 교실에 앉은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 눈빛은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눈빛과 똑같았다. 그것이 꿈에서라도 본 할머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모습이었다. 동생들은 꿈도 여러 번 꾸었다고 하는데, 내가 인정머리 없게 굴어서 할머니가 꿈에도 안 나오시나 보다 하면서도 못내 서운했다. 그럴 때마다 이불 밑에 묻어둔 옷을 꺼내 입어가며 몇 번의 겨울을 버텼다.



첫아이를 낳고 한 달 만에 당진으로 이사 온 때도 겨울이었다. 승용차로 다섯 시간을 달리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유독 그해에 눈이 많이 오기도 했다지만 남쪽에서만 살았던 나는 살다 살다 그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보았다. 산이 없는 지형도 낯설었고, 가슴이 답답해서 가본 바다도 펄이 가득해서 내가 알던 바다와 달랐다.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아기는 너무 많이 울고, 잠을 자지 않아서 괴로웠다. 달리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으므로 인터넷에 물어보며 아기를 키웠다. 갈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줄어들었고, 좋은 엄마가 될 가능성은 더욱 요원해져서 또다시 괴로워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추운 겨울에 이사 온 탓에, 집 안에서만 아기를 기르며 나는 또다시 방에 고립되었다.


"나는 잘 먹고 잘 자는 아기였나요?" 

"내가 많이 울지는 않았나요?"

"나도 방긋방긋 웃으면 많이 귀여운 아기였나요?"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궁금한 것을 모두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키우면서 기쁜 때도 있었는지,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는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는지 전부. 아기를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졌지만, 물어볼 곳이 없다는 것이 붙잡을 곳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아기가 커갈수록 나를 키워 준 할머니가 더 그립기만 했다.


내 몸이 아파서 울고, 남편 퇴근이 늦어서 울고, 아기가 잠을 안 자서 울고, 아기를 키우면서 울 일만 더 많아졌다. 책임질 생명이 있으니 혼자 누워 아플 때보다 하루가 몇 배로 더 무거웠다. 그렇게 눈물 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추워진 나는, 살기 위해서 온기를 붙잡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이불 밑에 내복이나 잠옷을 묻어두는 것이었다. 묻어 둔 옷을 꺼내 나도 입고 아기에게도 입혔다.


엄마 따뜻해요.


어느 날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란 아이가 내복을 입고 환하게 웃었다. 따뜻해서 좋다고 매일매일 옷을 이불 속에 묻어놔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따뜻함을 내 아이도 같은 곳에서 느끼는 것을 보니 눈물이 났다. 아, 이렇게 할머니께 받은 온기가 전해져 내려가는구나, 이것이 온기를 전하는 비법이구나! 좋은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따뜻함만큼은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이도 온기를 마음속에 품고 인생의 항해를 떠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퍼뜩 들었다.


초등학생이 된 큰아이는 아직도 그때 일을 종종 이야기하며 동생들 내복을 나와 함께 이불 속에 묻어 놓기도 한다. 포근한 이불 속 내복은 항상 인기 만점이다. 좋아서 깔깔 웃는 아이들의 얼굴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춥다. 뜨시게 입어라, 뜨시게.” 할머니 목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등교하는 아이들 등 뒤로 나도 외친다. 아직 바람이 차가우니 따뜻하게 입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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