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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Oct 16. 2023

프롤로그

00 '김애국' 아니고 '김보희'입니다

저출생 시대인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10여 년 전 큰 아이 때만 해도 산후조리원을 예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태어나는 아기들이 많았는데, 그 이후부터는 아기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사회의 흐름 속에서, 처음부터 애국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애국자가 되어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애국한다고 등이라도 두드려 주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제가 김애국입니다.”라고 말할 넉살은 더더욱 없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을 많이 낳았어요?”


다자녀 부모라면 한 번씩 듣기도 하는 질문이다. 어느 때엔 서로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누구는 아이들이 예뻐서 낳았다고 했다. 누구는 다자녀가 로망이라고 했다. 누구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또 누구는 영원한 내 편을 만들고 싶어 낳았다고 했다. 이렇듯 각자의 이유가 모두 달랐다. 우리가 4남매를 낳은 것도 애국심보다는 남편과 나의 신념 때문이었다. 형제들 속에서 키우고 싶었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의지하며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계속 낳고 길렀다. 


쉽지 않았다. 결혼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은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니 ‘하면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직접 겪고 보니 생각보다 더 큰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며, 때로는 고민이 가득한 괴로운 밤들을 동반하는 것이 육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잘 길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매 순간 나의 감정은 불안이나 자책감, 또는 강박감 같은 어둡고 좁은 지점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을 더 지지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서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된 것 같다. 이런저런 ‘장래 희망’들이 있었지만 가장 크게 바랐던 것은 ‘어른이 된다’는 그 자체였다. 어른이 되면 꿈에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만이 분명했다.


내가 나를 더 사랑했었다면 꿈꾸었던 모습으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어도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들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던 나는 너무 무르기만 해서 쉽게 포기했고, 넘어져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잘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저 흐르는 대로 살면서 학생이었다가, 환자였다가, 엄마가 되었다. 어른이 되고는 싶었으나 막상 삶의 여러 고비를 맞을 때는 어른스럽게 대처하지도 못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되는 것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급기야 자아까지 흔들리게 된 나는, 항상 ‘자격’에 대해서 고민했다. 사랑할 자격의 유무, 사랑받을 자격의 유무에까지 생각이 파고들어 매일 코너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오늘로부터, 내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에 ‘자격’은 없었다. 아이들 말처럼 엄마는 그냥 엄마지 다른 자격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어설픈 희망이나 다짐으로라도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덕분이리라. 젖먹이들을 기르던 시절을 떠올려 볼 때, 어느 순간은 흐리거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렸던 시간을 기억하려고 이 글을 썼다. 이것은 또 한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사랑을 준 존재를 잃고,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흐려진 기억을 모아 글로 쓰면서 지나온 시간을 톺아볼 수 있었다. 자라면서 사랑받고 있었음을 느끼지 못했던, 어딘가 부서져 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나도 사랑받고 자란 사람인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발견이었다. 늘 요동치던 마음도 차분해졌다. 그 덕에 이제는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지금이라도 고향 집에 가면 거실 미닫이문을 열고 ‘왔나?’ 하시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할머니, 나의 할머니.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 전부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하늘도 사라지고, 땅도 꺼지는듯하여 나는 바다로만 가고 싶었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 자리를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생전 바람처럼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은 못 되었어요. 대신 네 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키웠습니다. 그러느라고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절의 기억을 얼마쯤은 잃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서운해 하지는 마세요.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온기와 사랑은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고, 또 그중의 일부는 증손자들 안에도 남아 있을 테니까요. 이제 저도 애만 쓰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자주 웃으며 살아보려고 합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이제는 편히 쉬세요. 




울며불며 온 것이 때때로 부끄럽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살아낸 것에 감사하다.


2023년, 김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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