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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Apr 21. 2023

그 날, 나의 유년이 끝났다

01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사진 속에서도 내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대신에 할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키워주셨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같이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어린 나는 굳게 믿었다.


내가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집을 떠났어도 할머니는 우리 집, 454-10번지에서 마당을 청소하고 꽃나무에 물을 주며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다니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풍경이 나에게는 곧, 변하지 않는 믿음 같은 것이었고, 고향의 풍경이기도 했다. 다소 엄격해지기 쉬운 부모의 자녀 사랑과 달리 조부모의 손자 사랑은 상대적으로 넉넉하다고들 한다. 나도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조금 늦게 철이 들어도 괜찮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림, 글쓰기, 재봉, 요리 등에 두루 재능이 있는 분이셨다. 끝이 없었을 집안일에 손자 셋을 키우며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을 텐데도 인형 옷이며 손자들의 옷을 재봉틀로 손수 지어 입히고, 집안에 필요한 여러 물건까지 직접 만들어 사용하시곤 했다. 요즘에는 흔한 음식이지만 그 당시 그 골목에서 홈메이드 핫도그, 케이크, 닭꼬치 같은 것을 간식으로 먹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모두 솜씨 좋고 부지런한 할머니 덕이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사랑과 노력이 나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할머니의 재능을 내가 조금이라도 물려받았다면 내 손끝에서 지금도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자라면서 이도 저도 잘 해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내 속에는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것 같아서 자주 쓸쓸해지곤 했다.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존재에 대한 후회나 회한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학교에 갈 때면 골목 귀퉁이를 돌아서는 손자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머니는 대문 앞에서 지켜보셨다고 한다. 동생들과 달리 나는 한 번도 가던 길을 멈춰 뒤돌아 손을 흔든 적이 없다며 많이 서운해 하셨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나는 알지 못했다. 웬일인지 자라면서 늘 우울하고 외로웠는데 그럴 때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으므로 그런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사랑을 더더욱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키에 비해 마르고 체력이 약한 편이었던 할머니는 자기소임을 다하기 위해 너무 애를 쓰셨는지 연세에 비해 일찍 약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할머니의 기력과 총명함을 자꾸 앗아가다가 종래에는 혼자서는 잘 움직이시지 못하고 계속 누워만 계시게 되었다. 병원 생활을 너무 힘들어해서 집에 계셨고, 부모님이 일을 하다 집에 자주 들러 할머니를 돌보고 식사도 챙겨드렸다. 막냇동생은 어리고 나는 졸업반이라는 이유로 여동생이 할머니 간병에 애를 많이 썼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도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명색이 첫 손자인데! 할머니가 더 애정을 쏟았을 터인데도 옆에 있어 드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위해 여러 조치를 해놓았음에도 용변은 꼭 화장실에서 하고 싶으셨던지 혼자 일어나려다 그만 넘어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셨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그러나 뇌에 고인 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기에 할머니의 몸은 너무 작고 약했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가시던 날은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내가 잠시 고향 집에 들른 날이었다. 할머니는 말은 못 하셔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앉아 있었는데 할머니의 눈빛이 갑자기 흐려진다 싶을 때쯤 구급차가 왔다. 아직도 눈에 선한 붉은 경광등 불빛은 어두웠다 밝아졌다 깜빡거리며 작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심장이 뛰는 것 같이 깜빡이던 불빛이 유난히 불안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시니 나아서 다시 오실 거라고 주먹을 꽉 쥐었지만, 무슨 예감에서였는지 겁이 나서 구급차 앞까지 나가보지도 못하고 주먹 쥔 손을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할머니의 형제들과 자식들이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 다들 울면서 와서 울면서 돌아갔다. 가까워져 온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다들 컸다. 결국 병원에서도 더 손 쓸 수 있는 것이 없어 요양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제야 아무리 울고 기도하여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도 깨닫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어도 청력은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무정한 손녀는 할머니 귓가에 대고 사랑을 말하고 구원을 전했다. 그때 할머니의 영혼은 어디 있었을까? 내 목소리를 들으셨을까?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병원에서 면회한 것이 땅 위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2006년 11월 2일 목요일이었다. 할머니에게 밝은 데로 가시라고, 그러면 또 만날 수 있다고 귓가에 속삭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순간 의식도 움직임도 없던 분이 왼쪽 발가락 다섯 개를 구부리시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게는 '오냐' 하는 대답으로 들렸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울었던지 이틀 후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는 오히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처음 겪는 가족의 장례식은 경황이 없기만 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도 꽃도 다 가짜인 것 같고 조문객들은 배우 같이 느껴졌다. 집에 가면 할머니가 계실 것 같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할머니를 산에 묻고 온 날도 심신이 알 수 없이 지쳐 곧장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었다.



그 전날과 다름없이 해가 뜨고 새가 우는 아침이었지만 내게는 조금 달랐다. 그날은 내가 숨 쉬는 이 땅 '위에' 할머니가 없는 첫날이었고, 할머니가 이제는 나와 같이 한 해에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갈 수 없는 세상이 열린 날이기도 했다. 그제야 느껴지는 한기에 터져 나온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부지런하게 집에 들러서 할머니랑 밥 한 끼라도 더 같이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너무 슬펐다. 사랑을 단 한 번도 사랑으로 돌려드리지 못한 나의 무심함이 나를 찔렀다. 내가 만약 좀 더 일찍 할머니와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외로움이 할머니가 일찍 세상을 뜨게 만든 것은 아닐까?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이 꺼진 것처럼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밥도 사라지고, 옷도 사라지고 할머니도 사라졌다. 성냥팔이 소녀는 할머니와 같이 갔지만 나는 같이 가지도 못했다. 곧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나이였음에도 여전히 방황 중이었던 철없는 나는 '밥은 잘 묵나?'라는 말의 온기와 사랑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실수했을 때 '괜찮다. 그냥 놔둬라. 아직 아(아이의 경상방언)다.'라고 감싸줄 사람이 영영 사라졌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따뜻함이 울타리가 되어 세상의 차가움을 견디게 한다는 것을 그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져나오는 눈물 속에서 할머니의 죽음으로 나의 유년도 끝이 났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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