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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May 12. 2023

탯줄로 이어졌던 우리

03

출산 예정일을 넘긴 지 1주일, 양수가 터졌다. 첫째 아이여서 나는 어떠한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수없이 읽었던 출산 후기의 내용도 막상 때가 되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은 타지에서 직장 생활 중이었으니 병원까지 오려면 4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양수가 다 빠져나가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급히 산부인과에 갔다. 경황이 없는 중에 무통 주사는 꼭 맞아야 한다고 동의서를 건네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


막달까지도 배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헤엄을 치던 아기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분만이 임박하면 태동이 줄어들기도 한다지만 혹 양수가 줄어들어서 아기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기가 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교통사고로 살짝 휘어진 척추에 무통 주삿바늘을 꽂기 힘들다고 마취과 의사는 짜증을 냈다.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 산모가 몰린다는 병원답게 진행은 척척 되었지만, 나를 위한 프로세스는 아니었다. 그날, 산부인과 병원의 모든 것이 나는 불편했다.


불안을 넘어선 불쾌한 기분, 그것은 나의 분만에 나와 아기가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었다. 지금 상태는 이렇고, 병원에서는 이런 조처를 할 것이며, 어떤 조짐이 보이면 분만실로 옮긴다는 설명만 있었어도 나에겐 충분했을 텐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상황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왜 아기가 뱃속에서 잘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다른 분만실에서는 아기를 맞이하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나의 혜린이는 병원에 온 지 24시간이 지나도록 태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아기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서 길을 잃은 것일까? 이미 틀렸는데 나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아닐까? 무통 주사약 기운에 졸다 깨다 망상에 빠지거나 진통에 시달렸지만, 병원 지시에 따라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통 주사를 맞지 말 것을 그랬지. 무통 주사의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진통을 느낄 수 없으면 아기가 나오려는 신호를 알아챌 수가 없어 분만이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다음번에 의료진이 분만실에 들르면 제왕절개를 해달라고 해야겠다고, 수술이 무서웠지만 아기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고 주사약 때문에 하반신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데도, 힘을 잘 못 준다고 분만실 간호사는 타박을 주며 내 배를 눌렀다. 이런 환경이라면 다시는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는 순간, 으-앙-하며 새빨간 아기가 배 위에서 작고 말랑말랑한 모습으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삭 때 커진 배만 할 줄 알았던 아기는 세상에 나와 보니 아주 작은 존재였다. 귀엽다. 좀 전까지의 불안과 불만은 벌써 잊고 동생도 있으면 좋겠다고 첫째를 낳자마자 생각했다.



퇴원해서 아기와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하반신에 힘이 빠져나가더니 걸을 수가 없었다. 예고 없이 하반신에 힘이 썰물처럼 빠졌다가, 밀물처럼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물어물어 그것이 무통 주사 부작용일 수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게, 무통 주사를 맞지 말 것을 그랬다니까. 하지만 나는 혼자였고, 아기를 먹여야 했다.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걸을 수 없는 날에는 바닥에 앉아 양팔로 몸을 지탱하고 엉덩이로 바닥을 밀고 다니면서 아기를 돌보았다. 흐르는 땀만큼 하루가 너무 고단했다. 


벽에 잠깐 기대어 눈을 감으면, 하늘에서 포탄이 떨어져도 아기를 키우고 있을 먼 나라의 엄마들과, 60여 년 전 한겨울 피난길에 아이를 업고 달렸을 엄마의 엄마들, 그리고 죽은 아기를 삶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목소리도, 머리카락도, 두 눈도 내주었던 안데르센 이야기책의 엄마가 생각났다. 그런 엄마들의 무수한 사랑과 용기는 너무나 깊고 위대해서 내 것과 견줄 수 없어 보였다. 아기를 낳고 내가 들어서게 된 세계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광활한 우주였고,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아 두려운 곳이었다.


멈추지 않고 흘렀던 시간만이 언제나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차근차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둘째가 우리에게 왔다. 하반신의 마비 증상들은 어느새 사라졌으나, 병원 분만의 불편한 기억이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병원 초음파로 아기의 상태는 확인했지만 거기서 낳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나와 아기의 건강에 큰 문제가 없어 가정 분만을 하기로 했다. 응급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하늘이 주신 생명은 하늘이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첫째 아이를 맡아줄 곳이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낳고, 낳은 자리에서 누워 조리하는 것이 두 아이를 같이 돌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산골에서 자라 본인도 집에서 태어난 남편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산모인 나의 의사를 가장 존중해 주어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여러 조산원 중에 가정 분만이 가능하고 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안산에 있는 조산원을 최종 선택하였다. 24시간 언제든 진통이 시작되는 것이 느껴질 때 연락하면 조산사님이 바로 집으로 오셔서 함께 분만을 도와주시는 방식이었다. 같은 시간에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전화가 오는 때도 있었나 여쭤보니 20년 가까이 조산원 운영하시며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하셔서 신기했다. 정말 아기들은 하늘이 돌보는구나! 나는 용기가 생겼다.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출산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원체 겁이 많은데 맨 정신에(?) 아기를 낳으려니 몇 배로 긴장되었다. 경험이 많고 푸근한 성품의 조산사님이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고 잘 다독여 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분만 과정에서 엄마인 나뿐만 아니라, 아빠와 큰아이도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막내까지 가정 출산을 했고, 아빠와 아이들이 동생 환영 편지를 써서 읽어주며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는 시간도 가졌다. 둘째 혜강이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 혜린이가 3살이라 가위질이 서툴러 아빠와 함께 탯줄을 잘랐다. 셋째 혜준, 넷째 혜건이 탯줄은 혜린이가 잘라주었다. 특히 넷째는 누나, 형들 등교 시간 전에 태어나서, 동생이 태어난 것을 집에서 보고 왔다는 소리에 대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진 선생님께 전화가 오기도 했다.



신생아부터 초등생까지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을 혼자 돌보는 것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동생을 밖에서 낳아서 데리고 오면 큰아이가 샘을 낸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키우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어서 감사했다. 큰아이들이 아기가 잘 때는 조용히 놀고, 모유를 먹일 때는 놀아 달라고 보채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엄마가 누워있으면 아이들끼리 알아서 놀기도 했다. 우리는 정신없는 한 시절을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다.


아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탯줄로 엄마와 연결되어 있던 시절이 남아있는 것일까? 탯줄이 끊어져 자기 발로 걷게 될 만큼 커도 ‘엄마 옆에! 엄마 옆에!’를 외치는 시기를 한 번은 거치는 것 같다. 동생에게 ‘껌딱지기’가 오면 큰아이들도 동참하게 되는 것이 다둥이네의 흔한 풍경이다. 이 시기에는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닫을 수가 없고, 팔이 닿는 범위 안쪽으로는 항상 아이들이 있다. 개인 시간을 가지기란 불가능하여 잘 때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평균 3년 정도의 모유 수유 기간이 끝난 아이는 엄마 품을 졸업하고(?) 밤에는 아빠와 함께 자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다. 이제 큰 아이들은 자기 전에 포옹으로 엄마 냄새를 충천하고 가고, 더 어린아이들은 내 옷을 칭칭 감고 자러 가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은 문 하나 밖에 아이들이 있다. 부쩍 큰 것 같아도 아직은 어린아이들이. 


더 크면 내 손이, 내 눈이 닿지 않을 곳으로 가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지. 그때는 엄마 냄새가 없어도 잠들 수 있고 엄마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어렴풋해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부모의 사랑이 단단히 남아 있으면 좋겠다. 이 시대에 아이 넷을 낳아 키운 부모의 용기가 전해져서 어디로든 용기 있게 갈 수 있고, 어디에서나 안녕할 수 있는 굳센 아이들로 자라면 좋겠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힘든 ‘오늘’이 아쉽고 그리울 날도 오겠지만, 아이들이 나로부터 분리되어 떠나는 것이 인생이 응당 흘러가야 하는 방향임을 안다. 그때에는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분리불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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