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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Jun 30. 2023

좋겠다, 우리 애들은.
할머니가 있어서

07

고향 집에서는 식혜를 단술이라고 불렀다. 물도, 밥알도 달콤한 식혜가 나는 좋았다. 식혜를 만들 때 필요한 질금 가루(엿기름)를 시장 방앗간에서 사 오는 것은 항상 내 몫이었다. 그날만큼은 돈을 들고 직접 물건을 구매하는 내가 어른이 된 듯 뿌듯했다. 시장에서 만난 어른들에게 심부름 잘한다고 칭찬받는 것도 내심 좋았다. 하지만 밥알이 동동 뜰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몇 알이나 올라왔을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밥솥 뚜껑을 열어 보다가 할머니께 야단도 많이 맞았다.


유년이 끝나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식혜도 사라지고, 커피가 그 빈 자리를 빠르게 차지했다. 그러는 사이 삶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인가를 잊거나, 잃어갔지만 식혜를 만들 때 쓰던 빨간 바탕에 하얀색 꽃무늬가 그려져 있던 커다란 전기밥솥만은 오래도록 생각이 났다.



다시 집에서 만든 식혜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결혼 후였다. 늘 주뼛거리는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몰라 어려움이 많다. 그날은 시가 식구들이 처음 모두 모인 자리였다. 새댁이었던 나는 긴장감에 눈의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져 냉장고 뒤에 숨어 있었다. 어쩔 줄 몰라 숨은 등 뒤로 시어머니가 음료수를 건네주셨다. 어머니가 만든 식혜였다. 홀린 듯 두 잔을 연거푸 마시니 막내며느리가 좋아한다고 갈 때마다 식혜를 만들어 놓으셨다.


식혜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딘가 모르게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는 시어머니가 좋았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시는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꽃을 사 가면 분위기를 모르는 아들 셋 키울 때는 못 받아본 선물이라고 기뻐하셨다. 건강식품을 사 가면 "오래 살겠구먼." 하고 좋아하셨다. 그 세대 여느 분들처럼 전쟁 후의 가난을 딛고 고단하게 때로는 섧게 살아오셨음에도, 고생스러웠던 삶을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좀 더 오래 고단하신 것인지도 몰랐다.


정 많고 순한 시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어머니가 부족한 중에도 자식들에게 넉넉하신 것이 때로는 아팠다. 하지만 지척에 살지도 않는,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자식은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손자들 얼굴이라도 자주 보여 드리려고 부지런히 시가에 갔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 커가는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서로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 믿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내 마음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시가에는 나와 정반대로 활달하고 주도적인 성향의 손윗사람이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상냥했지만, 나에게는 늘 트집이었다. 내가 싹싹하지 않고 내성적이라 싫다고 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나와 아이들을 괴롭혔다. 아기 수유를 못 하게 하고, 밥 먹을 때 반찬을 먹었다고 괘씸해했다. 나는 거기서 주로 굶었다. 우리가 시가에서 뭐라도 하나 더 얻어 갈까봐 짐을 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껄끄러운 일은 모두 나에게 책임을 돌렸다. 괴롭힘도 고통도 끝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오래 참는 쪽을 택했다. 시부모님은 자식들이 오손도손 잘 사는 것만 바라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제들끼리 싸우면 마음 아파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른들이 살아 계신 동안만이라도 표 안 내고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병이 났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버텼지만 나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어느 심장질환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임신 중이라 치료도 어려웠던 나는 살기 위해서 서서히 발길을 줄였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으셨던 시어머니. 살아온 이야기를 몇 번인가 꺼내시려다가도 다 지난 옛날이야기 소용없다고 이내 입을 다무셨던 시어머니. 그런 분이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도 없는데 뇌출혈이라니 겁이 났다. 중환자실은 면회 시간과 인원이 정해져 있어 막내며느리인 나에게까지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는데.


일반 병실로 옮기신 후에도 얼마간은 말씀도 못 하시고 거동도 불편하셨다. 눈앞에 자식, 손자가 와 있어도 인사 한번 건네지 못하는 상황이 시어머니도 답답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만 마주하다 돌아오기만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앞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좋다고 하셨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안다고 하셨다. 막내며느리가 착해서 말도 못 하고 참느라 병이 난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수록 옆에서 잘 챙겨야 한다고 남편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들은 말보다 더 많은 말이 순식간에 쏟아지니 이것이 유언이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몇 주가 더 지나고 완전히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오신 후에는 다시 예전처럼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가 특별한 기회를 빌려 마음속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친지 중 누가 아들을 봤다고 하면 “낳기만 하면 아들인데 뭘” 하며 시큰둥할 정도로 시가에는 아들이 더 많다. 시어머니의 직계 손자도 마찬가지여서 일곱 명 중 딸은 둘 뿐인데, 그중 한 명이 우리 집 혜린이다. 백일과 돌 때 손수 고른 옷을 선물로 주시면서 딸 옷을 사봐서 세상 소원 다 풀었다고 하셨다. 그때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갓 말을 배운 세 살 혜린이가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인사 했을 때, 시어머니의 얼굴에 서서히 피어나던 환한 기쁨을 나와 남편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시어머니가 “내가 혜린이가 그려준 것 다 모아서 가지고 있다.”고 환하게 웃으며 자랑하시는 것을 보니 그 기쁨은 아직 시들지 않았나 보다. 이제 사춘기의 문턱에 있는 손녀는 언제 쓰고 그렸는지 기억나지 않는 편지와 그림을 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아이들이 할머니의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길 바랐다. 누군가의 글과 그림을 보관해 두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게 됐으면 했다.


시어머니를 많이 닮은 남편과, 남편을 많이 닮은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시어머니의 모습이 슬쩍슬쩍 보여서 괜스레 마음이 촉촉해진다. 이제 집에서 식혜를 만들지 못할 만큼 약해지셨어도 손자들을 향한 넉넉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 손에 항상 먹을 것이 잔뜩 들려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좋겠다, 우리 애들은. 할머니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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