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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Jul 16. 2023

30년 뒤에 내게 닿은 말, "괜찮다"

09

살면서 늘 듣고 싶었던 한 마디는 '괜찮아'였다. 괜찮은 건 정말 괜찮은 거니까, 온전한 수용의 말이니까 그랬다. 고단한 어른은 혼자 치맥이라도 하러 갈 수 있지만, 어린이에게는 부모가 전부다. 힘든 날엔 부모님께 투정도 좀 부리고 괜찮다는 말도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이 있어 나는 언제나 ‘다 큰 애’였다. '다 큰 애'는 응석을 부리면 안 된다. 하고팠던 말과 눈물을 속으로 삼키면 커다란 눈깔사탕이 통째로 넘어간 듯 가슴이 답답했다. 내 안에 메워질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 것 같았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결핍이 그 꺼칠꺼칠한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커다란 구멍 속으로 숨기 바빴다.


일하는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엄마와 가깝게 지내볼 새도 없이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주름도 늘었고 다니는 병원도 늘어났지만 ‘반짝이 눈’이라는 별명처럼 엄마의 눈빛만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의 눈을 보니 나이가 들어도 존재가 품고 있는 영혼의 속성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엄마의 모습에서조차 낯섦을 느끼는 내가 나는 조금 슬펐다.


표현도 잘 없고 무채색 같던 엄마가 실은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모에게 듣고 알았다.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 엄마는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삶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오신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엄마도 나처럼 괜찮다는 말이 필요한 날이 많았을 텐데. 진작 알았다면 우리는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낮에 엄마가 집에 있는 친구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렇다고 나도 기죽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동네 친구와 싸우면 할머니가 중재해 주었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와야 하는 유치원 행사 때만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오지 못하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는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 구석에 어설프게 서 있었다. 시선은 씩씩하게 정면을 향했어도 마음 한구석은 저릿했다.


엄마가 소풍에 함께 온 친구는 돗자리에 앉아서 김밥을 먹었다. 선생님도 엄마들과 함께 앉아 엄마들이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혼자 서성거리며 몇몇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친구들도 어렸으니까 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같이 먹자고 말할 주변머리가 없어서 멀찍이 떨어진 넓은 바위 위에 혼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나를 두고 갈까 봐 선생님 쪽을 계속 주시하면서. 즐거움에 들뜬 웅성거림 속에서 내 주위만 등 뒤가 서늘하도록 고요했다. 엄마가 없으면 혼자가 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여섯 살이었다.


생일잔치 날은 더 곤란했다. 생일 맞은 아이와 엄마가 한복을 입고 와서, 낳고 길러주신 엄마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취지로 큰절하는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오지 못한 나는 엄마 대신 선생님께 절했는데, 그것이 꼭 엄마를 배신한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이듬해 생일잔치 때는 엄마가 근무 중에 잠깐 나오셨다. 한복을 입지 않은 나와, 양장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선생님께 큰절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곱 살이었다.


할머니가 계셔도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와의 시간이 고팠던 나와 동생들은 엄마의 퇴근을 기다렸다. 엄마가 퇴근길에 만화 비디오를 빌려오거나 책을 얻어 온다고 한 날에는 더 일찍부터 기다렸다. 오락거리가 없는 동네에, 읽고 싶은 책을 다 사 볼 수도 없었으니, 엄마가 가져오는 책이나 비디오는 곧 새로운 세계였다. 비 오는 날에 주워 온 세계 명작동화 몇 권을 한 장, 한 장 조심히 펴서 말려 읽으며 언젠가는 전집을 전부 다 읽으리라는 꿈을 키웠다.


우리도 가족 여행을 가보자고 졸랐지만, 엄마의 여름휴가는 짧았고, 나와 동생들은 해마다 실망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나날이 늘어나는 세 아이를 보며 엄마는 몰래 한숨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사고 싶은 책도 많고, 무슨 무슨 소년단 같은 것도 해보고 싶던 나는, 결국 엄마를 울렸다. “너도 자식 키워봐라. 하고 싶은 거 다 해주고 싶지.”하고 엄마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다.


철없는 소망은 아픔이 될 수도 있구나. 커 갈수록 말이 오가면 부딪히기만 하니 나는 점점 더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줄어든 대화의 시간에 비례하여 관계도 멀어졌다. 때때로 이유 없이 미움 받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와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소원했던 친정엄마와도 결혼 후에는 가까워졌다는 경험담을 들을 때마다 외로웠다. 결혼 후에도 엄마는 엄마로서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셨지만 내 마음이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보다 가방끈이 더 긴데도 전업주부가 된 나에게 엄마가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담감과 자책감으로 더 뒷걸음쳤다. 그때의 나에게, 엄마는 도달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지점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할머니가 된 엄마가 손자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얼마나 낯설고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자식을 볼 때와 손자를 볼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엄마가 원래 말 없고 무뚝뚝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나에게만 정이 없었나 싶은 정도였다. 엄마와 함께였으면 했던 순간에 엄마가 없었던 기억도 자꾸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혼자 바위에 앉아있던 여섯 살 아이는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며 할머니를 떠올릴 때, 엄마도 할머니가 떠올랐었나 보다. 엄마도 나와 동생들이 클 때는 할머니가 집에서 얼마나 힘들지 세세하게 헤아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딸이 아이를 기르는 것을 보며, 살림하며 손자 셋을 키운 할머니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고 했다. 함께 살며 같이 고생했던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살아 계실 때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내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 간병으로 가장 많이 애쓴 사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섧게 운 사람도 엄마였다. “서운하게 해드린 것 있으면 다 용서하고 가이소.” 하던 엄마의 울음이 흙과 함께 할머니를 덮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후, 자식들도 모두 떠난 집에서 엄마는 매일 할머니의 흔적을 돌아보고, 할머니의 부재를 마주하며 명복을 빌고 있었을 것이므로, 할머니가 엄마의 마음을 모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나와 엄마는 더 가까워지지도 못했고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궤도를 살아가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도 있는 거라고, 표현이 없었어도 엄마의 사랑은 거기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이제는 이해해 보려고 한다. 헌책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기쁘셨을까. 아니면 새것을 사 주지 못해서 마음이 무거웠을까. 그 당시 엄마의 퇴근길을 상상해 보면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마음이 아리다.


셋째 혜준이를 낳았을 때쯤 엄마도 은퇴하게 되어, 머나먼 우리 집까지 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셨다. 그리고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가시며 “네가 고생이 참 많다.”고 말씀하셨다. 멀어서 그랬을까. 평생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던 ‘괜찮다’는 말이 그때, 내게로, 마침내 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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