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란 Aug 25. 2023

고기와 우유 안 먹이면
'극성 엄마' 인가요?

10 알레르기 있는 네 아이와 집 밖의 세상을 만나기까지

미운 사람 안 보고 살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야!


친구들과 힘내자고 반농담으로 나누는 말이다. 어쩌면 굉장히 소박한 소망이지만 둘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는 날은 많지 않다. 촘촘히 엮어둔 사소한 즐거움과 행복이 내가 힘들 때 나를 지탱해 준다는 것, 깊은 고통의 때에는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감사할 거리나 기쁨을 찾으려고 순간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나 승리자가 되는 날은 드물었고, 아이 키우는 일이 고단해질 때마다 나는 집 안으로 깊이 숨었다. 그래도 아이들만은 튼튼한 배에 올라타 넓고 큰 세상으로 나가길 바랐다. 잘 살아가길 바랐다. 그래서 음식 알레르기는 더욱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으며 ‘브라보’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10년에서 몇 년 더 알레르기와 싸우는 동안 알레르기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조금씩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알레르기가 ‘엄마의 유난’이 아니라, 심각한 경우에는 생명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늘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채식 열풍이었다.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채식 간편식을 마트에서 사 먹을 수 있게 되어서 먹을거리 걱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육 기관과 교육기관에서는 알레르기 여부를 미리 조사해서 대체 반찬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우리 집 아이들도 세상으로 나가기 쉬워진 것이다.


취학 전에는 알레르기로 놀리는 친구들은 없었다. 오히려 특별하게 생각했는지 알레르기 있어서 못 먹는다는 우리 아이의 말을 따라 하며 같이 안 먹겠다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식품 알레르기에 대한 영상을 같이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영상을 본 후 맛있는 음식 못 먹어서 힘들겠다고 위로하는 친구들도 있었단다.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초등학교는 사뭇 달랐다. 하교 시간에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면 오늘이 평화로웠는지 아닌지 대략 눈치 챌 수 있었다. 급하게 누르는 날은 서너 번은 잘못 누른 다음에야 문이 열린다. 오늘은 무슨 일일까?


엄마, ○○이가 진짜 알레르기 반응이 나는지 보고 싶다고
우유 먹어보라고 입에 자꾸 갖다 댔어요.


뭐라고? 나는 재빨리 학교 앞으로 뛰어가 ○○이를 만나서 그 애 집까지 같이 갔다가, 그 아이의 부모님과 조부모님까지 만난다. 마음을 가라앉혀 보기야 하겠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아 조금은 큰 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지. 물론 머릿속에서. 짧지만 깊은 부글거림 끝에 겨우 내뱉은 한마디. "속상했겠다."


여러 번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자, 결국 선생님의 중재로 사과도 받고 일단락 되었다고 했다. 아이의 속상함이 집까지 이어진 날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메뉴를 바꾸어 마음을 달래주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마음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고, 아이들답게 내일이면 다 잊고 어울려 놀 가능성이 크니까. 오히려 나의 속상함이 더 오래갔다. 아무리 아이지만 너무하다. 잘 몰랐다고, 장난이었다고 하겠지? 그 친구와 같이 놀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도 다른 친구가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어하면 도와줄 것은 없는지 살펴야지, 놀리면 안 된다고만 덧붙이고 입을 다물었다.



속상하게 하는 친구와 무작정 등지는 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음식 알레르기 문제를 설명하고 거절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고, 아이가 살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도 막상 이런 일이 생기면 감정이 먼저 부글거리는 엄마였다.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아이를 어떻게 위로하고 대처 방법을 말해줘야 좋을지 늘 고민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인생에 너무 많다. 이런저런 생각에 속이 시끄러워도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는 고요하고, 눈 감은 얼굴들은 나를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아이들이 모유만 먹던 갓난쟁이 시절, 부족한 모유를 보충하느라고 분유를 먹일 때마다 아기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동물성 단백질인 우유 및 유제품, 소고기, 돼지고기와 계란이 원인이었는데, 모두 성장에 필수적인 음식이거나 ‘완전식품’으로까지 불리는 음식이었다. 잘 먹어야 잘 크는 것을 나도 알았기에, 이유식 요리책이나 인터넷 경험담을 뒤져보며 동물성 단백질 대체 음식이나 요리법을 부단히 찾아다녔다.


고기나 우유가 들어갈 음식이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포함된 식품이 많았다. 그래서 콩을 삶아 갈아 두유를 만들었다. 과일을 넉넉히 갈아 3분의 1은 주스로 먹고, 다른 3분의 1은 아이스크림 틀에 얼리고, 나머지는 한천 가루를 넣고 끓여 젤리로 만들어 먹었다. 쌀 과자는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지겨울까 봐 틈틈이 약식도 만들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은 못 먹더라도, 먹는 즐거움 자체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보는 재미라도 있으라고 간식을 만들 때나 밥을 담을 때 자동차나 동물, 꽃 모양 틀을 자주 이용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편식하게 되어 아이들이 잘 크지 못할까 봐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태어나서 먹어 본 음식이 엄마가 만든 것이 전부여서 그랬는지, 간이 안 맞고 맛이 좀 이상해도 골고루 잘 먹어 주었다. 그 덕분에 살도 통통하게 붙고, 염려했던 빈혈도 없었다.


식재료를 조심스레 먹여보며 하나하나 알레르기 반응을 체크했는데도, 두드러기는 계속 났고, 가려워 긁으면서 우는 밤은 길었다. 긁은 자리는 곪기도 해서 아토피에 좋다는 말린 어성초 우린 물로 씻겨보기도 하고, 천 기저귀로 바꿔보고, 보습이 중요하다는 말에 로션도 듬뿍듬뿍 발랐다. 지금 같으면 좀 더 대범하게 이것저것 먹여볼 수도 있었을까 한 번씩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때는 아파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아기를 그대로 삼켜 버릴 것 같았고, 내가 대신할 수 없는 아기의 고통을 지켜보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랐다. 해로운 모든 것을 부모가 다 막아줄 수 없다는 것, 인생에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몫이 있다는 것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크게 아프지 않게만 해달라고 기도에 기도를 더하면서 키웠다.



걷기 시작하며 아이의 생활 반경도 함께 넓어졌다. 놀이터에서 비슷한 또래들을 만나 놀기도 했다. 하지만 먹는 것이 다르니 계속 함께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집에서 만든 간식은 휴대가 불편해서 우리는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가서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우리를 배려해 주느라 자기 아이의 간식 시간을 미루는 아기엄마들이 있어서,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언젠가 부터는 멀찍이서 따로 놀았다.


다른 사람의 배려를 피하는 것은 그래도 나았다. 하지만 ‘너는 잘못하고 있어’라는 말은 불편했다. 나는 겨우 찾은 길이었는데 틀렸다니! 우유나 고기는 꼭 필요한 영양소이니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더라도 무조건 먹여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면 잘 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자기 아이가 피가 날 정도로 긁어대거나, 고열에 시달리며 피부 껍질이 벗겨지거나, 곪았어도 고기를 먹일 수 있었을까.


싸울 기운도 없던 나는, 사람을 만나봐야 속만 상하니 피하는 쪽을 택했다. 왜 못 먹는지, 왜 어린이집을 안 가는지 아이들이 커갈수록 해명하고 설명해야 하는 일은 자꾸 늘어갔다. 모두 어린이집 간 시간에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애들이 어린이집에 가야 배우는 게 있지 엄마가 양육 수당 받으려고 안 보낸다고 혀를 차는 동네 어르신의 속 모르는 소리에 바로 눈물을 쏟을 만큼 그때의 나는 여렸다. 꿋꿋하게 집에서 키우는 아이가 셋이 되어서야 간섭하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엄마도 같이 자란다더니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도 다시 집 밖에 나올 용기가 생겼다.


어쩔 줄 몰라 동동거렸던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알레르기 체질로 낳았다는 미안한 마음, 또래와 자주 어울리지 못해 사회성이 부족해질까 걱정했던 것, 급식 먹을 때 못 먹는 음식이 나오면 시무룩해질까 염려했던 것은 아이들에게는 의외로 별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없는 음식을 구분하여 영양 선생님께 직접 말하기도 했고, 못 먹는 음식에 호기심은 가졌지만 속상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방법을 찾으며 생활했다. ‘낳아 놓으면 알아서 잘 큰다’라든가 ‘제 먹을 것 다 타고 난다’는 말은 그냥 흘려들으며 살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삶의 방법을 찾는 것도 제 먹을 것 타고 난다는 말에 포함되는 것 같았다. 음식 문제로 놀리는 친구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도가 지나치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할 줄도 아는 것이 혼자서 끙끙거리는 나보다 나았다. 기우였구나. 안도감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너무 걱정만 했던 것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지금에 충실하고 오늘에 기뻐했다면 좀 더 빨리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드디어 아이들도 세상에는 엄마가 해준 음식보다 맛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레르기가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숨겨두었던 커다란 비밀을 들킨 것 같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 밥이 좋다고 해준다. 아무래도 내가 요리에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알고 넌지시 응원해 주려고 하는 말 같다. 자라면서 못 먹는 간식 먹겠다고 떼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나름 원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계속 휘청거렸다. 힘들 때 날아들어 온 날 선 말에 나는 쉽게 다쳤고, 한마디씩 거드는 말은 백 마디가 되어 더 무거워졌다.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없었다. 혼자 아등바등 어떻게든 하노라고 할 때는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모두 똑같이 타인일 뿐이었는데. 그 시간이 쉽게 평가당하는 것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도 컸다. 나는 긴 시집살이를 겪은 사람처럼 결심했다. 누가 묻기 전에는 절대로 남의 육아에 간섭하지 않을 거야. 위로도 충고도 조심스러워야 해. 필요하다면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되자.


아이들을 낳은 것은 잘한 일이다. 내가 엄마로 살게 된 것도 신기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닐 때의 나는 누군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더는 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가야 할 방향도 알지 못했다. 늘 도망가고 싶어 하는 내가 지구별에 머물기 위해서는 아이 네 명분의 중력은 필요했던 것 같다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헤아려 볼 뿐이었다.


이전 10화 30년 뒤에 내게 닿은 말, "괜찮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