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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Jun 17. 2023

엄마는 왜 우리를 떠나려고 하실까

08

육아의 세계에서 나 자신은 물에 녹듯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세상의 중심이 너무 빠르게 아이에게로 옮겨갔으므로 가끔은 여기가 꿈속인 듯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버는 돈의 크기로 사람의 가치를 줄 세우는 세상에,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사람이 낄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직업의 세계에서의 나는 육아의 세계 속의 나보다 더 빨리 지워졌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는 억울한 일을 겪고 오면 할머니가 나서서 싸워 주셨지만, 이제는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는 맞서 싸울 힘은 도저히 생기지 않았고 아픈 말을 듣고 멍해지는 시간 만 점점 더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내면이 너무 물렀던 나는 자책과 비난으로 자주 무너졌다.


주변의 대단한 지지와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도, 힘들게 배운 것은 써먹지도 않고 ‘겨우’ 집에서 아이만 키우느냐는 핀잔은 견디기 어려웠다. 육아가 힘들지, 공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혼자 꿍얼거려도 보았다. 직업도 없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나를 깎아내리던 말은 나를 삶의 끝으로 밀고 갔다. 힘들어도 일과 육아를 동시에 멋지게 해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무어라 할 말도 그때는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꼭 엄마나 아빠 친구 딸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엄마가 직업이 없어서 부끄럽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밤이 오면 나는 불안과 슬픔을 뒤집어쓰고 적당한 답변을 미리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좋은 엄마’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으면서 좋은 엄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내내 나를 짓눌렀다. 사라지는 자아를 붙잡으려 허우적대는 나에게는 좋은 엄마의 속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좋은 엄마라는 것은 ‘모성’이라는 한 마디로 자주 뭉뚱그려졌으므로 나는 모성이 없는 엄마로 느껴졌다. 모성이 없는 사람도 엄마라고 할 수 있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에, 정체성만 더 혼란해질 뿐이었다.


불안 위에 세워진 확신들은 결코 건강하지 못했다. 나는 사랑이 없으니, 아이들을 잘 키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그래서 결국에는 아이들도 나를 싫어할 거라는 확신이 그러했다. 사랑한다면서 아이들의 성취를 기대하게 되는 것, 기대가 어긋났을 때 크게 실망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상처받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내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랬기에, 선택할 수 있다면, 최소한, 첫 아이는 딸이 아니었으면 했다. 첫째 딸인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여동생이 꿔 준 호랑이 태몽이 아들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음에도 첫아이는 딸이었다. 딸인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아기가 나와 내 인생을 닮을까 불안했다.


나의 불안이 나의 불행에서 온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주변의 기대를 받는 딸이었지만 그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어른들이 실망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아직도 눈에 선한 어른들의 실망 섞인 표정과 무거운 한숨은 어린 나에게는 짐이었다. 그 부담이 너무 커서 ‘실패한’ 나는 그 한숨의 무게만큼 불행해져야 그 실망을 달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잘될 것이라고 믿는 어른은 많았어도 내가 ‘어떤 상황에서라도’ 잘 해낼 거라고 믿어주는 어른은 없었기 때문에,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몇 번을 넘어지든 바로 다시 일어나서 계속 가면 된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넘어진 것’은 결코 ‘잘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감에 혼자 괴로워했고,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인생의 어려움은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여겼으므로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힘들다는 말에는 죄책감이 몇 배로 따라붙어 무거워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배가 자주 고팠지만, 시가에든 친정에든 반찬을 좀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할 수 없었다. 요즘엔 맞벌이도 많다는 말 앞에서, 직장이 있어도 좋겠지만 누군가 아기를 한 시간만 맡아줄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밥을 좀 먹고 링거도 한 대 맞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기 때문에.



인생에는 실패로 주저앉는 순간이나 일부러라도 쉬어가야 하는 순간이 무수한 것임에도, 힘겨움이 목젖까지 차오를 때마다 나는 거기가 끝인 줄 알고 포기하려고만 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니까 이제 그만하고 멀리 도망가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이제 겨우 아이들을 조그맣게 키워 놨는데 그만두면 아이들이 가엾지 않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조그맣게’라니, 나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몇 번이고 읊조려 봐도 아파서 엉엉 울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느라 이렇게 버텨왔다고 말하고 싶어도, 오히려 아이들 덕분에 내가 버틸 수 있는 날들이 더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버텨보자고 마음을 다시 먹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될까, 아이가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데 내가 걸림돌이 될까 전전긍긍하며 아이들과 늘 몇 걸음의 거리를 두려고 했다. 적어도 보이는 곳에서는 크게 칭찬하지도 않았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형이니까 이래야지’, ‘누나니까 양보해야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우리 엄마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면서도,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큰 소리와 몸짓으로 칭찬해 주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엄마는 왜 우리를 떠나려고 하실까?


어느 날 여섯 살 혜린이의 그림 속에서 발견한 낙서다. 나의 깊고 짙은 우울을 들키지 않도록 거리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좀 더 잘하고 싶을 뿐이었다고, 좋은 엄마가 못될까 봐 겁이 났다고, 우울한 엄마와 함께하면 너희들이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은 끝끝내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들의 서운함을 모른 척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나의 무심함에 관대하였을 뿐 아니라 지친 엄마와 함께하는 단조로운 일상도 잘 견뎌주었다. 우리는 주로 흙을 파거나, 그림을 그리고, 욕조에서 물장난을 치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혼자 놀다 지친 첫째 혜린이가 안아달라고 할 때도 있었지만, 더 어린 동생을 안고 있을 때가 많아서 혜린이는 아기띠 끈을 잡고 아쉬워 하기만 했다. 아마 동생이 자기보다 더 어린 아기라는 것을 알고 길게 보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네가 더 이상 갓난아이가 아니라서 서운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말해주며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것도 못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나 하나뿐이었는데,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 충분히 함께 웃고, 함께 울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사무친다.



아이를 기르는 방식이 수천 가지인 만큼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도 수천 가지일 것이다. 어느 방식이든 사랑에 책임감이 지나치면 아이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쉽기에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더욱 조심스럽다. 그래서 언제나 아이는 나와 다른 독립된 존재이며 나름대로의 삶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자라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아이를 돕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것도 늘 마음에 새긴다.


마을 어귀에 걸린 ‘합격 현수막’을 보면 자식 잘 키워 대학 공부시키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 앞선 부모 세대의 공통된 꿈이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나도 부모님의 꿈이었을까? 만약 이루어지지 않은 아픈 꿈도 꿈이라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이 오고, 저런 날이 가도 가슴 속의 꿈들은 나이를 먹지 않겠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꿈으로 자라나서 이제는 꿈이 많은 아이들을 길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넘어져도 괜찮다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해 비슷한 풍경으로 맞이하는 계절에 갈수록 서글픔이 더해지는 까닭은 내가 나의 시작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내 꿈을 좇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부모님이 건강하고 아이들이 어린 지금이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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