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일 년 만에 그만두고 싶었겠어
마지막에 그만두었던 회사는 통근 시간만 왕복 3시간이었다. 한 시간 반을 7호선, 2호선을 오가다가 어떤 주에는 매일 미주신경성실신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면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사람, 더러는 아가씨 쓰러질 것 같으니 자리 좀 비켜달라고 대신 나서주는 사람 등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았다. 남들이 겨우 짜낸 선의 덕에 나 역시 겨우겨우 버티며 다녔던 것 같다.
당시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인터넷 사이트는 정말 24시간 마트구나. 우리 사이트에는 밤에 이용하는 사람이 특히 많았다. 집에 와서 어영부영 씻고 뭘 먹고 휴대폰 보는 시간은 밤 12시~새벽 2시. 그러나 우리는 2교대로 일하지 않아서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아서 어떤 날엔 그냥 자듯이 죽고 싶었다. 늦게 자면 잘수록 불안이 나를 잡아먹을 듯 굴었기 때문이다.
회사 일은 짧은 사이클로 돌아가며 매일의 목표치가 있었고, 매주, 매달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성과를 측정했다. 당시 우리 팀은 내가 들어가던 해 예상치 못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상사에게 좀 찍혀 샌드백 신세였다. 어떤 주에는 매일 30분씩 벌서기도 했다. 회의실에서 5시간 동안 혼난 적도 있다. ‘왜 그렇게 일을 못 해?’ 한동안 그 말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일을 잘하고 싶었고, 과로와 불안에 함께 시달렸다. 잘하고 싶다. 잘하는 게 맞나? 더 잘하고 싶다. 매일 같이 매 순간.
물론 이 모든 것을 회사 탓으로 돌리기에는 나도 양심이 있다. 나라는 사람이, ‘신입’으로서 부족하고 아쉬운 자신을 도무지 참아내질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이 고질병은 내 실력을 인정받아 업계에서 나름 내로라하는 회사로 가게 되면서 한층 심화되었다. 화장실 청소를 달마다 맡아하던 회사를 다니다가, 걸핏하면 ‘이것도 몰라요?’ 하고 혼나고 죽고 싶냐는 소리를 듣던 회사를 다니다가, 사회적으로 예의를 지키는 회사를 만났다. 게다가 그 회사에서 나에게 인재라고 돈까지 얹어 주겠다고 한다.
세상에서 누가 날 필요로 한다. 내가 쓸모 있단다! 아주 쥐덫 같은 말이다. 눈앞의 큰 함정을 보지 못하고, 나는 그 스카우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어떤 함정이냐면 바로 인정받고 싶다는 ‘나 자신’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회사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그 말을 믿었어야 했다. 내 신조로 삼고 다녔어야 했다.
회사에서 직원은 큰 프로젝트를 이루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바퀴는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지만 바퀴 그 자체로는 쓸모없다. 회사 밖을 나가면 난 다시 한 사람이 된다. 손톱만 한 톱니바퀴가 다른 모든 바퀴들 역할까지 다 하려고 욕심내면 어떻게 될까? 손톱만 한 녀석의 과오로 이어진 다른 친구들이 삐걱댄다. 얼떨결에 돌아가긴 해도, 조직 내에서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이 생길 수도 있고 손톱만 한 녀석이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사실 꽤 중요한 녀석이라고. 나 없으면 안 되겠다는 착각 말이다.
나는 착각했고, 내 착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즉 ‘진짜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계속 안간힘을 썼다. 하루라도 일 생각을 안 해본 적 없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매일 대여섯 번은 들어가서 시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새로 판매되는 인기 제품, 소비자들의 새로운 트렌드 등등을 돌아주지 않으면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괜찮은 콘텐츠가 나오면 꼭 봐야 했고, 보고 나면 왜 재밌고 사람들이 이걸 왜 보고 왜 인기가 있는지 줄줄 읊을 정도로 분석해서 외우고 다녔다. 누군가 ‘이건 봤어?’ 란 말에 아니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참을 수 없었다. 안 봤을 수도 있지. 오늘 보겠습니다. 라든가, 아직 안 봤다고 말할 수도 있었거늘, 내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계속 어필하고 싶었다.
자사 신작이 나왔을 때도 나는 주기적으로 들어가서 협력사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에 현재 일어나는 일이 뭐가 문제인지 살폈다. 내가 문제를 파악하기 전에 상사에게 한 소리 듣거나, 전화라도 받으면 어딘가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독버섯처럼, 한 번 생긴 부정적인 집착은 여러 곳으로 번졌다. 상사가 한 소리 할 수도 있는 건데 나는 그 한 마디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근처에서 친구와 영화를 보고서도, 다른 곳에서 약속을 치르고 나서도 자꾸 회사로 돌아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다. 내 인생에 회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운동도 해봤고 요리학원도 다녀 봤지만 그때뿐이었다. 더 중요한 일. 즉 회사 일 생각에 늘 정신이 쏠려 있었다.
업계 트렌드도 파악하랴, 자사 신작 퀄리티와 일정도 파악하랴, 프로모션 매출과 홍보도 파악하랴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런 생각도 했다. 이대로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과로로 빨리 죽는 것도 내게는 좋은 일 같다고,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인가 싶지만 육체적으로 힘들면 일단 몸 아픈 걸 참느라 정신이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한다.
시야가 좁아지고 계속 같은 범위의 생각만 했다. 너무 힘들다. 쉬고 싶다. 아프다. 평소 몸무게에서 10kg가량이 빠졌고, 이빨이 하나 깨졌으며 힘들다는 소리를 남들에게 자꾸 하게 됐다. 그런 말이 없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조절할 뇌 영역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과로사가 꿈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쉬고 싶었고, 피곤해서 허물어진 내 모습이 스스로 싫었고 사회적 체면을 챙기지 못하니 상사에게도 난 골칫덩어리였다. 앞날이 보이지 않았고, 나아갈 자신이 없는데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두렵게 다가왔다.
선명히 기억나는 어떤 겨울날 먹는 걸 줄여보자는 생각을 했다. 건강을 어떻게 하면 더 나쁘게 만들어서 치료 없이 병으로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말을 자세히 하는 이유는,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사람들이 왜 죽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하고, 그들에게 쉽게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나도 그런 적 있다. 그런 기분 안다. 죽을 필요까진 없다’고 위로한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실이 없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든 상대에게 닿고자 하는 위로다. 나도 살아 있으니 너도 살아가자는. 그러나 슬프게도 사는 건 이성적인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로 점철되어 있다. 죽음을 장려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삶이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역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나는 그냥 주위에 징징대며 울며불며 지났다.
과거를 바라볼 때 너무 몰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생판 모르는 남을 바라보는 척하기가 쉽지가 않다. 우리는 가끔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고, 그런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어떤 삶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심지어 내 삶조차. 결국은 저마다의 불가해한 감정과 서러움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고 동시에 당시의 나 역시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그런 사람이다. 그냥. 그러니 나는 다만 바라볼 수밖에. 다소 온정적으로. 어떠한 해석도, 풀이도 없이. 다만 어떤 퇴사는 살아남으려고 한다. 세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스스로는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