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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Dec 28. 2019

자립생활이 도대체 뭔데

2019년 마지막 수다장인

'자립생활'이라는 말을 비장애인은 사용할 일이 없다. 장애인은 어찌 보면 자립생활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말하는 순간부터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다른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다.

단어가 주는 무거움도 있고 그 의미 또한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힘의 차이가 있지만 장애인은 힘의 차이보다 힘이 '있느냐' '없느냐' 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클러치를 내려놓고 발을 딛는 순간 뼈가 부러지겠지만 그것 또한 내 힘의 정도가 그 정도인 것인데도 걸을 수 있냐, 없냐 관점으로 접근한다. 걸을 힘이 부족하지만 '클러치를 집으면 걸을 수 있다'는 것과 '걸을 수 없어서 클러치를 집는다'라는 말은 완전 다른 의미다.

자립, 자립생활을 비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씌어준다면 그것에 100% 충족된 사람은 없다고 본다. 자립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자립이라는 말이 뱉어지는 순간 어떻게 해야 자립생활을 잘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들어본 적 없다.

비장애인이 반찬을 못 만들어 먹고 어머님이 차려주거나 택배를 보내 주거나 반찬가게에서 사 먹는 다고 해서 '자립생활이 안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지만 장애인이 반찬을 해 먹지 못하면 자립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요리교실, 일상생활 등등등 프로그램으로 프레임이 씌여진다.

그런 활동으로 삶의 질이 높아지느냐는 다른 문제다. 적어도 요리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본인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선택하는 것이다. 필수가 아닌 선택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를 못한다고 해서 '자립생활이 되고 있나 없나'로 접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수다장인은 '자립생활'을 논하지 않는다. 우리는 요리학원을 다니고 싶은 사람들 중 환경에 의해 거부당하거나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자립생활이라는 태두리에서의 서비스나 정책이기 전에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자립생활을 논하는 순간, 못하고 있는 것과 잘하고 있는 것이 갈려져 버린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싫고 '내가 그래서 장애인이야'라는 답으로 귀결되는 것만 같아서 더 싫다.

박승리도 최충일도 자립생활을 충분조건으로 보면 못하는 것 투성이다. 그것이 장애가 있어서 못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다가올 2020년 그것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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