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문을 하지 않고 내내 나를 노려보다 돌아갔다. 벽 없이 개방된 상점이자 공용 식탁을 썼기에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수치심이 들어서 뒷목이 뻣뻣해졌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과거의 우리는 중학생, 하교를 같이 하는 절친이었다. 이따금 '너는 그렇게 착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라고 묻던 그는 어느 날 전화를 하다 다투고 나서 화장실로 나를 불렀다.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그곳에는 오가며 얼굴만 알던 이들부터 인사 정도 나누던 열댓 명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위기감을 느끼고 한쪽 벽면에 바짝 붙었다. 누군가 무릎을 걷어찬다면 주저앉아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듭 꿇으라고 강요하던 여럿이 그와 내게 서로 한 대씩 주고받으라고 제안했다.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한 듯 그도 당황스러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놀잇감이 되었다. 그와 나의 마지막 '우리'라는 굴레였다.
이후 마음 편치 않은 일상을 보내다 특기를 살려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향에서 나는 삼 년 동안 부재한 사람이었다. 운 좋게 수시에 붙은 뒤 돌아와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건데, 와플도 굽고 생과일주스도 만드는 아르바이트의 로망을 실현한 건데, 왜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찾아왔을까.
그날 그는 떠나기 전까지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더는 여러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간에서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혹시 또 찾아올지 모르는 그에게 친절할 자신도 없었다.
과외를 구하려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그때 나는 용돈이 필요했다. 초등학생 남매의 숙제를 봐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실상 가르칠 건 없고 부모님이 부재한 사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내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나와 함께하는 순간에 많이 웃고 나를 배웅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좋았다. 마음이 편해서 입꼬리가 들떴다. 미소가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과의 일상을 잊는 게 아쉬워 육아일기를 흉내내기도 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그걸 읽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뒹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 바보, 라는 소개가 인상적이었다'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 유민이 엄마였다. 유민이는 13개월 아기였다. 말로만 들어서는 상상도 안 가는 존재여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집안일할 동안 같이 있어주기만 해 줘도 좋겠어요'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평균 시급이 4,100원이던 시절. 앞서 말한 초등학생 두 명의 숙제를 봐주는 일은 시급 5,000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고급 인력이 된 기분이었는데, 유민이 엄마는 내게 시급 8,000원을 준다고 했다. 찾아보니 베이비시터나 놀이시터 아르바이트 시세가 그쯤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학업과 병행하고 싶었던 터라 솔깃했다.
며칠 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느 주말에 유민이를 만났다. 그 작은 사람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스물, 아기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