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
분노와 관련하여 아주 적절한 비유로 풀어쓴 글을 읽었다. 캐롤린 매허니는 자신의 책 <여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에서 분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쥐어짠 행위는 스펀지 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을 드러나게 만든 수단일 뿐이다. 만일 물기가 없는 스펀지를 짰다면, 물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스펀지처럼 쥐어짜면 그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다시 말해, 관계의 어려움이나 힘든 경험(마음을 쥐어짜는 요인)은 분노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이미 마음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 캐롤린 매허니, <여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194p
마음을 쥐어짜는 요인은 이미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그녀의 통찰에 겸허해졌다. 지난주 언니와의 통화에서 답답하고 억울하고 짜증 나서 기어이 분노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나왔던 사건이다. 언니는 내게 그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다. 언니도, 나 자신도. 누구에게든 그저 드러난 죄를 보며 애통하는 마음밖엔 드릴 것이 없다. 실망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혼자 있는 시간, 좁은 관계망, 말보다 글을 사랑한 나의 생활은 어쩌면 마음을 쥐어짜는 요인들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마음을 지키는 일에 성실해야만 한다. 마음을 지킨다는 건 마음을 쥐어짜는 요인들을 애써 차단하는 게 아니라, 쥐어짜도 흐를 것이 없게 하는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나를 돌보는 일을 넘어서 돌아보기 위한 시간으로, 좁은 관계망은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보단 소중한 관계를 먼저 지켜내려는 결과로, 말보다 글을 사랑하는 건 마음을 포장하려는 의도가 아닌 신중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의지로 나타나야 한다.
결국 말이든 글이든 내 안에서 나오는 거니까. 글로 아무리 정제해서 표현한다고 해도 본래의 성질은 변치 않는다. 쥐어짜는 요인이 무엇이든 드러나고 말 것은 드러나고야 만다. 내가 우아하게 퍼올려서 흘려보내고자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실상은 내 안에 고인 것만이 흘러갈 것이다.
분노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단 하나의 표정에서, 말투에서, 단어에서도 뚝뚝 흐를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쥐어짜질지 모르는 인생이다. 편견과 판단하는 마음까지도 반드시 흘러가게 되어있다.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으로.
글을 쓴다는 건 나를 쥐어짜는 행위다. 만약 내 안에 슬픔이 가득하다면 슬픔이 흘러나올 것이다. 슬픔을 짜지 않고 슬픔에 젖어 있기만 한다면 필시 곰팡이가 필 것이다. 내 안에서 슬픔을 짜낸다는 건, 슬픔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닌 보관하기 위해서다. 내 슬픔이 오염되기 전에, 슬픔이 슬픔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또한 누군가 얼마나 슬펐니,라고 물으면 이만큼 슬펐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분노는 스스로 짜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평소 갖고 있던 판단과 오해, 심지어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등이 쥐어짬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만 같다. 그러니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기로, 좋지 않은 마음은 먹지 않기로 한다.
내 안에 고인 것은 날마다 스스로 쥐어짜고, 양지바른 곳에 나를 뉘어 쉬게 해야지. 햇빛과 바람에 널어둔 것이 어느새 바싹 말라 있다. 다시 무엇을 깨끗하게 할 힘이 생긴다.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