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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03. 2024

행복을 흉내 낼 권리

누구나 누릴 자격이 있다


어릴 적 속상했던 일은 많지만, 그중엔 지금까지도 속상한 것이 있다. 어머니께 무엇을 드렸을 때 그녀가 좀처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대개 어릴 적 고른 선물은 실용적이지 못한 특징이 있으나, 부모를 생각하는 그 마음만큼은 충분히 누릴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언니와 나는 오히려 두고두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금전에 관한 일에 뒤끝이 가장 심했다. 차라리 한 번 혼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다른 집처럼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생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생일자에게 축하한다는 말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부모님은 올해 내 생일까지도 전화하지 않았다. 내가 본인들처럼 생일을 음력으로 쇠는 것도 아닌데 매년 모르신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매번 생일에서 하루쯤 지나 내가 먼저 전화드린다. 나를 낳느라 고생하셨다고. 당일에 먼저 전화드리지 않는 건 늦게라도 먼저 축하 전화를 걸어오실까, 올해는 기억하실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학교 생활에서 친구들끼리 생일을 챙기는 문화가 낯설면서도, 막상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생일을 챙기게 되면서, 조금 커서는 우리 집에도 그런 문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생신 날, 언니와 작당하고 케이크를 사 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저 다른 집처럼 기념일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어머니는 죽상을 했다. 진심으로 싫어하셨다. 마치 한 번 챙기면 해마다 계속 챙겨야 하는 제사를 기껏 없애놨더니 우리가 부활시킨 것처럼, 어머니의 얼굴에는 수심과 짜증이 가득했다. 물론 우리 형편에 영양가는 없고 싸기만 한 케이크는 사치였던 걸 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마의 생신을 준비한 딸들의 갸륵한 마음, 아니 사실은 평범한 가정의 문화를 그날만큼은 누리고 싶어 던 딸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결국 차라리 돈으로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겨우 이만 원을 봉투에 넣어 생신 선물로 드리고 싶진 않았다. 그건 어쩐지 더 비참했다. 우리도 나름 이만 원으로 모두가 그 순간만큼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선물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이만 원도 안 되는 케이크값을 어머니께 드린다 한들, 그것도 온전한 어머니의 몫일 리 없었다. 우리에겐 일 년에 딱 네 번 돌아오는 그 하루도, 그 잠깐의 순간도 평범함이라고 불리는 사치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가난해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들이 있다.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이 있다.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연출된 순간일지라도,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한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는 흉내 내는 행복일 수 있다. 흉내 낸다고 해서 가짜는 아니다. 흉내는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복은 학습으로 얻어지기도 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을 흉내 낼 권리는 왜 안 되는가?


요지는 돈이 어디 있어서 그걸 샀냐, 돈이 어디 있어서 그걸 했냐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도 순간의 행복을 위해 큰돈을 투자한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돈도 큰돈이겠지만, 그들도 어떤 순간만큼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비록 흉내에 불과하더라도 행복을 흉내 낼 권리가 있다. 그것을 주제넘은 행복 추구권이라며 비웃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구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고 쓸 것을 아껴서 구제하므로 그것이 요긴하게 잘 쓰였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가치 측면에서 이 형편에 사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까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후원자들을 위한 각종 회계보고는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겠으나, 그것이 집행에 대한 판단을 요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긴급성에 따라 재정 사용에 우선순위는 세울 수 있겠지만, 필요성을 논하는 것까지는 자칫하면 월권행위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선교사님이 치료의 목적으로 구비해 둔 미네랄워터와, 취미로 감상하기 위해 걸어놓은 그림때문에 후원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비량이 아닌 파송 선교사는 파송받은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후원받는데, 그 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이 선교팀을 꾸려 선교사님 댁을 방문한 후 가치판단을 한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네랄워터는 보통 사람도 비싸서 못 마시는 거고, 단지 감상을 위해 그림을 사는 건 사치라고. 그림은 현지 길거리에서 5~10만 원 선에서 구매했다는데, 가족이 용돈으로 부쳐준 돈으로 구매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교회의 사정을 모르니 어느 편에 서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선교사의 생활은 청빈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행복의 모양도 검소해야 한다는 우리네 생각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돈이 없는 사람도 주어진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들이 누리는 것에 설령 내가 얼마를 보탰다 할지라도, 그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정작 자기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사실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돈이 있어도 삶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기에, 낯선 느낌에 대한 시샘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탈무드 잠언집>



그러므로 나는, 남의 삶을 시샘하지 않고 나의 삶을 누리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이나 돈이나, 있어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은 되지 않기로. 그러므로 돈이 없는 지금, 무급의 생활에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필요하다면 감히 행복을 흉내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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