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련 Oct 24. 2021

바다 끝에서

권태와 아름다움

  2019. 3. 12.


  핸드폰 앨범을 정리하다가 작년 늦가을쯤 다녀왔던 경포대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숙박 앱으로 미리 2주 전에 펜션을 잡고 당신과 강릉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날이다. 작은 캐리어에 한껏 짐을 욱여넣은 채 우리는 바다를 끼고 둥글게 이어지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숙소는 예상 이외로 경포대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숲 속에 있었다. 바다를 보려면 택시를 타고 10분 가까이 나가야 했지만, 외진 곳에 위치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펜션 앞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무수히 많았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다. 후드 집업 하나를 입고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만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곳은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함께 가선 안 된다고, 친구는 누누이 얘기하곤 했지만 나는 번번이 언제 내가 그런 말을 들었냐는 듯 당신과 아름다운 곳들을 다녀왔었다.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바다를 보러 가는 게 싫어지지는 않았다. 바다는 원래부터 그냥 바다였을 뿐이라는 것처럼 남아 있었고, 다만 나는 당신과 내가 어쩌다 경포대를 가게 되었나 생각에 잠겼다. 당신이 당신의 친구로부터 '너는 돈이 없어서 폴로 랄프 로렌 못 살 걸.'이라는 못된 말을 들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당신이 보여주는 폴로 랄프 로렌의 셔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나? 나의 일상을 흔들어주었던 당신이 나에게 마음이 식어가는 걸 보고도 못 본체 하고, 새로움에 목이 마른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나.


  당신은 낭만, 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곤 했다. 낭만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좋은 말이다. 낭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두고 나의 낭만이라며, 낯부끄러운 표현을 마다한 적 없었고, 종종 당신이 다니는 대학교 발코니에 올라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두고 당신과 함께 오랫동안 새벽을 즐기기도 했다. 당신이 그런 게 낭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무조건 좋았고 당신과의 연애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낭만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야.


  대개 연인이 그러하듯, 당신도 나와의 연애에서 어느 순간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편안함이 안락함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권태에 가까웠고 더 이상 낭만적인 삶을 지속시키기 어렵겠다는 불안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의 낭만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요구했다. 늘 봐오던 풍경과 다른 풍경. 다른 소리. 다른 사건과 다른 감정을.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갔다.


  당신이 내게 새로움을 갈구해올 때마다 나는 우리가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에 가까워졌다.


  핸드폰 앨범에 남아 있는 영상 하나를 제외하고 당신과 바다에 관련된 모든 사진을 삭제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애인을 추억하며 경험했던 낭만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집중하고 있었을 때, 슬픈 마음으로 촬영했던 파도의 영상이다. 포말이 깨진 맥주병과 목장갑, 조개껍데기 따위에 부서져 사라지고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새파란 바다의 풍경 일부를 기억하고 있으면 나는 어디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는 나의 자유로움마저 사랑하고 싶다. 문득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어 핸드폰 메시지 창을 켜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가 자유하기를 바라.

이전 09화 아침이 깊어가는 동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