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다낭. 공항을 나서서 처음으로 한 말은
“계절을 반대로 가는 게 휴양이라지만 이 정도면 고행 아니야?”
그곳은 따뜻함을 넘어 숨이 탁 막히는 더위였다.
난생 처음 방문한 동남아는 생각보다 더 덥고 정신없었다. 인천공항까진 패딩을 입고 갔었는데 여기선 반팔을 입고도 땀을 흘렸다. 거리는 조금 소란스럽고 어디서든 수많은 오토바이가 달려들었다. 베트남에 가기 전 이런 요령을 들었다. 베트남에서 길을 건널 때는 절대로 뒷걸음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야? 기세에 밀리면 무시당해?’
그게 아니라 앞으로만 걸어가면 오토바이들이 알아서 피해 가니 괜히 주춤거리거나 뒷걸음질 치면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과연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앞만 보고 걸으니 길을 건너긴 건넜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려대는 통에 잔뜩 겁먹고 말았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있는 나를 향해 4차선 도로 가득 오토바이가 산사태처럼 밀려왔고 내 뒤로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달려오고 있는 오토바이가 합심해서 빵빵 소리를 더했다.
날카로운 소리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위협이나 경고가 아니라 ‘익스큐즈미 지나갈게요~’ 하는 느낌으로 나에게 신호를 주기 위해 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라마다 운전 습관도 매너도 다르니 여기서는 경적을 울리며 다니는 게 습관적인 건 줄 알았는데 정작 내가 탄 택시가 중앙선 완전히 넘어서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섰을 땐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갔다.
목적지인 호텔로 좌화전 해서 들어가려고 했던 건데 거긴 좌회전이 가능한 곳이 아니었고 그냥 대로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멈춰 선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앙선을 넘어서 반대편 1차로에!
마주 보고 차들이 계속 달려오고 있는데 기사님은 너무 평온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탄 택시를 피해 가는 차들 중에는 중앙선을 넘어 비켜가는 차도 있었다. 서로 역주행이잖아!
그래서 신호등이 있으면 너무 반가웠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선 차도 오토바이도 다 멈춘다. 당연하지만 안심이다. 도로 위에 세워진 낯선 모양의 신호등에는 빨강, 파랑, 노란색 불이 세로로 세워져 있기도 하고 불이 열십자로 점등되기도 한다. 동그란 신호와 십자 모양 신호가 어떤 차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보는 열십자 신호등에는 좀 더 눈길이 간다.
좁은 인도에서 옆으로 쌩쌩 내달리는 오토바이들에 움츠린 채로 종종걸음을 걷다가도 알사탕 같은 신호등을 만나면 빨간불 앞에 한 숨 돌리고 서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 흔한 마사지샵이나 작은 손수레 노점. 2층 발코니에 걸린 빨랫줄 같은 것들이 다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여름처럼 트인 하늘과 쨍쨍한 햇볕 냄새가 좋았다. 생각하면 어느새 그늘에 세운 오토바이 위에 누워 계기판 위에다 등을 기대고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호텔 뒤 작은 마트 앞에 앉아 마시던 차가운 페트병 차가 그리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신호등 앞에 서서 파란 불을 기다릴 때면 눈을 돌려보기도 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세상을 걷고 있는지 기억하면서 걸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