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왕페이는 아니거든요
내 밤톨머리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머리를 여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 날 밤, 입원 전에 집에서 일부러 짧은 단발로 자르고 간 머리를 베타딘 용액으로 감고 잠들 때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진통제에 절어있을 때 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밤톨 가시가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다시 기르는 과정은 너무도 중요하고 그래서 더 긴 여정이었다.
대학 때 알던 여자 선배가 호기심에 삭발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주 우아하고 예쁜 이미지였기 때문에 상상이 잘 가지 않았지만 삭발 머리는 두상이 예뻐야 하니 어쨌든 그 언니의 작고 동그란 머리는 예쁜 삭발이긴 했을 거다. 그리고 언니는 지난 일이라고 크게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다.
"하자마자 후회했어! 미친 짓이었던 거야. 내가 미쳐서 미친 짓을 했던 거지."
그 말을 듣고 남일처럼 웃을 게 아니었다. 수술 후 갑자기 비구니 같은 머리가 되어버리니 문득 그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 저도 미치겠어요!
흉터 주변의 머리가 길어 커다란 수술자국을 덮는 데까지만 근 넉 달이 걸렸다. 어색하게 깡총하던 앞머리가 어느 정도 길어 조금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다시 석 달.
거기에서 시간이 더 지나 머리를 민지 도합 열 달 정도가 지나니 여자들이 일부러 자르는 숏 커트 정도의 길이가 되었고, 1년 째에는 드디어 뒷 머리를 모아서 묶을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머리도 결국 적응은 되고, 누가 '아이고, 총각인 줄 알았는데 아가씨였네!'해도 그냥 웃고 마는 정신력도 갖추게 되었다.
오랜만에 모인 동문 모임에서 아빠 뻘인 어느 선배가 '얘, 너는 머리를 왜 그렇게 했니!' 하셨다가 내가 수술을 한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몰랐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모르고. 미안하다 현선아. 정말 미안하다.'하고 하루 종일 사과를 받은 사건도 있었으나, 아주 작은 해프닝일 뿐이다.
그렇게 가만 두면 잡초처럼 알아서 자라는 줄만 알았던 머리칼을 조금 더 소중히 하게 되었으니 몇 년에 걸쳐 허리께까지 다시 길러보기도 했고 찰랑거리며 늘어지는 느낌이 좋아서 생전 써본 적 없는 비싼 머리빗이나 에센스도 샀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머리가 길어지면 또 가볍게 흔들리는 단발이 그리워진다. 머리가 짧으면 매일 감는 시간도 엄청나게 절약되고, 신경 써서 말릴 필요도 없다. 어떻게 하든 항상 잔디인형 같은 스타일이니 자고 일어나서 눌린 머리를 매만질 필요도 물론 없다. 그러니 가끔은 그 편리함이 좋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물론 지난 일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어떤 날은 차라리 중경삼림의 왕페이처럼 바짝 잘라버릴까 생각하다가도 머리가 짧을수록 눈치 없이 앞머리보다 먼저 자라는 뒷머리 탓에 한 달마다 미용실에 가서 바리캉으로 정리하던 때를 떠올리며 참는다.
머리에 달린 머리카락이란 사실 피자 테두리의 빵 부분 같은 것 아닐까. 누군가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 또 누군가에겐 너무 중요해서 치즈 크러스트니 고구마 무스 같은 것으로 치장하곤 하는 것. 어쨌든 머리는 다시 길고, 좀 없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을 살아가다가 머리카락마저 거추장스러워서 좀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버린 분이 계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살면서 한 번쯤은 극도로 자유로워 볼 필요도 있으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내가 미쳤지!' 또는 '진짜 미치겠네!' 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점만은 미리 생각해 두시길.
여담으로 작은 웃음거리를 덧붙이자면-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온 다음 날. 병원 지하의 미용실에 가서 옆 침대의 간병인 아줌마가 알려준 대로
"수술하느라 머리를 민 부분에 맞춰서 나머지 머리도 다 밀어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신참인 듯 나이가 어려 보이던 미용사의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거... 몇 미리로 미신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