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트러블' 없는 자, 모두 유죄

by 헤븐

폭염이 여전한 것 같아도 새벽과 밤공기는 제법 선선해졌어요. 역시 박완서 선생님 말씀대로 '시간은 신이었던 걸까' 싶어요. 잘 지내고 계셨을까요. 민... 지난번 편지에서 '균열에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정말 동의했어요. 그리고 시작되었다던 트러블.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겠지만, 다만 그 시작점에 적극적으로 응원을 보태고 싶었어요. 사실 저도 비슷한 기분이기도 하거든요. 문학과 영화, 철학이나 심리학 등 여러 책 장르와 예술매체 등을 넘나들며 민과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기존의 세계, 관념, 생각, 사람, 게다가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다 어느새 생겨버리고 마는 틈... 벌어진 그 사이를 활자로 비집고 들어가다 보니 때론 해방감 때론 갑갑함과도 마주하게 되네요. 내면의 은밀한 복도를 지나가며 저 또한 예전에 몰랐던, 아니 꽁꽁 숨겨둔 '트러블'에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지금, 이 순간도. 어김없이 말입니다.



주디스 버틀러. 덕분에 도서관에서 바로 '젠더 트러블'을 빌려서 읽고 있어요. 문헌실의 보존서고에 있어서 일반 서가에서 독자들에게 '발견' 되는 기쁨을 왜 누리지 못하고 마는 것인지. 잠시 그 점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엉뚱하죠) 대표적인 퀴어 이론가인 버틀러에 따르자면 섹스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성(性), 그리고 젠더 (성별)라는 것은, 성 자체는 존재하나 정해진 성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또한 본질적이면서도 불변하는 성도 없을뿐더러 우리의 성별, 즉 젠더는 '구성'되는 것이라죠. 젠더는 변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요. 게다가 읽다 보니 저는 보부아르보다 버틀러에게 조금 더 응원을 보태고(!) 싶기도 했고요. 왜일까요... 사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어나가며 적잖은 분함을 느끼고 말았던 저로서는 말이죠.



보부아르는 '여성은 절대적 타자'라고 주장하죠. 여성들의 육체성은 - 월경, 임신 출산, 양육, 모성 등 - 그것이 도리어 여성 자신을 억압하는 족쇄라는 것을요. 왜 아니겠어요. (하...) 틀린 말 전혀 아니죠. 여성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여전히도 결혼, 출산, 육아, 살림이라는 길을 걷는 편이죠.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게다가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자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 전통시대부터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기도 했을 테고요. 물론 사회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글쎄요. 그 변화를 확연히 느끼지 못하는 유자녀 기혼녀로 사회생활을 하다 주부로서 대부분의 일상을 집에서 지내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무력이나 환멸을 느끼고 말 때면 말이 조금씩 없어진 채, 조용하게 살아가게 되고 말 뿐이고요.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성적 배우자이며 생식자이며 성적 객체이며 타자이다. 이 타자를 통해 남자는 자기 자신을 구한다. 전체주의 또는 독재 정치가 아무리 정신 분석학을 만장일치로 금지하더라도 또 충실하게 국가와 하나가 되어 있는 시민들에게는 개인적 드라마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선언하더라도 헛된 일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p. 95 -



캡처.JPG A Time to Remember, Pino Daeni



그녀의 논리가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는 해도 보부아르의 이야기가 꽤 분하게 느껴졌던 건, 여성이라는 젠더, 그 성별이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녀는 해석하지 않아 보였던 거예요. 게다가 보부아르야말로 은근히 '남자 되기'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같았고요. 그녀의 논리에 의하자면 여전히 남성 중심적 관점에 서 있었다는 점. 여성은 자유 의지가 박탈된 존재로 보고 남성을 결국 문화의 주체이자 자유의지를 지닌 유일한 존재로 봤다는, 남자와 여자를 철저히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가 어딘지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죠. 세상에 남자 혹은 여자로'만' 인간을 분류하는 그 꽉 조여 맨 시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생각들은 상당히 시원하게 다가왔어요. 하나의 고정된 젠더, 강요된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젠더, 여러 가지 섹슈얼리티가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꽤나 통쾌하게 느껴졌던 거예요. 단순히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짓는 것을 넘어서는 혁명적 생각. 기존의 젠더 구조를 확실히 해체하면서 또 다른 타자인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향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혁명'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그녀를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행동'하는 바에 따라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결정된다면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라는 게 사실 무효해 보여요. 젠더는 남성과 여성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우리가 흔히 그렇다고 생각하던 '시스젠더' 뿐 아니라 사실은 이 세계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던가요. 트랜스젠더, 제3의 성, 인터 섹스(간성)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존재하죠.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예요. 남자-여자 간의 이성애만이 어떻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등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존재하죠. 이성애만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지만, 여전히 어떤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마녀'라든가 '회개' 하라고들 한다죠. 저는 다만 후세대를,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자면,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마는 틀에 박힌 담론의 알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겨 새 시선의 따뜻한 살이 돋아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려면 기성세대가 움켜쥐고 놓지 않은 어떤 박혀버린 고루하고 무거운 의식이 움직여야 하는데, 쉽지 않은 법이죠.... 변화라는 건. 여러모로...



img.jpg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中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신은 원래 세 종류의 인간을 만들었다죠. 태양으로부터 유래한 남성과 남성의 결합, 땅으로부터의 여성과 여성 결합, 그리고 달로부터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혼성 결합체. 이렇게 세 종류의 인간들은 신들에게 주저 없이 싸움을 걸어 하늘에 오르려 한 죄로 제우스는 인간을 반으로 나누어 버렸다죠. 그리하여 분리된 인간들은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자신이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말했다죠...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사랑과 섹슈얼리티는 '개인'이라는 실존에게 어디까지 서로 결합하고 또 화합 가능한가에 대해서. 사랑을 통해 결혼까지 이어진다지만 결혼은 또 다른 사회집단으로 다가오고 개인의 섹슈얼리티는 점차 소멸되기 쉬운 환경에 놓인 채 지속되는 노동의 분업. 남편과 아내 - 이것도 따지고 생각해보면 이분법적 사고일 수 있지만 - 그 두 사람의 상호 책임은 결국 젠더로 구분된 동반자적 관계에 놓이는 것이죠. 주디스 버틀러가 현재의 기혼제를 본다면 기가 찰 노릇일지도요. 아내 남편 역할이 여전히 꽤 뚜렷한 기혼제. 남자와 여자가 할 수 있는 계약이자 두 사람 사이의 배타적 독점을 확실히 추구하는 법적 서약. 그래서 누군가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살아갈 뿐이죠. '동반자' 로서 그냥 '함께' 있는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사랑' 하다 죽을 수 있다면야. 사실 결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고 맙니다. 물론 저는 기혼자이니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요.



민... 사실 저는 요즘 좀 많이 갑갑한 상태에 놓여 있어요. 저만 이런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무언의 답답함을 어떤 식으로든 소화시켜보고자 최근에 저도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래 봤자 러닝머신에서 그야말로 죽어라 뛰거나 걷기 시작한 셈인데요. 많이 부끄럽지만 저는 제 몸을 다시 일정 부분 혹사(?) 시키는 것 같아서 저로서도 이런 제 자신이 좀 걱정이 되기도요. 그렇지만 한편 이 행위들은 일종의 발단이 있는 것도 같아요... 어떤 발단. 어떤 시작. 무언의 트러블이 있는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하고자 하는 나름의 방어책. 지금 트러블 없는 자들은 모두 유죄일 것이라는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나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ggg.JPG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中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말이 있죠. 그렇다면 저는 요즘 제게 굉장히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되묻고 있어요.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얼마나 살피며 관대하게 앉을 줄 아느냐고. 생각해보니 제대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타인에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절하나 자신에겐 박하고 모질고 못되게만 구는 제가 떠오르고 말아요. 한껏 잘해주고 혼자 상처 받고 괜한 자격지심에 밀려오는 감정의 덫에 빠지며 허우적대다 형편없이 비하하기 일쑤죠. 그래서... 이런 저는 누군가를 사랑할 힘이 과연 있는지에 대해서. 그야말로 '실격'이라는 생각에 자주 빠져버리곤 해요. 주어진 환경에 대해 최선의 마음과 행동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사랑하려 애쓰지만 솔직히 그럴수록 왜 저는 가끔 도무지 알 수 없이 힘이 쭉 빠지며 입술을 깨물며 뾰로통해지는 걸까요. 제가 연출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랑을 잘하고 있다는 연기를. 그렇다면 최우수연기상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그리하여 저는 조심스럽게 무례하지 않다면 묻고 싶어 졌습니다. 민,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나요.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나요. 사람은 왜 때로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무언가를 한편으로는 수치스럽게 생각하고도 마는 걸까요. 결혼 이후에도 '사랑'을 바라는 이런 저는 비정상인 걸까요. 아니면 이것도 정상적인 트러블에 속할 수 있을까요. 이 나이에, 이 현실에서, 제가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 것인지. 왜 여전히 누군가 - 부디 그가 - 나에 대한 지극한 걱정과 호기심과 관심의 여전한 대상이 되어 한껏 마음과 시간을 검열 없이 교감하기를 바라는 걸까요. 때로는 어이없는 투정과 짜증과 슬픔과 곤욕스러운 태도 속에서도 이런 모습에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앉아줄 수 있는 상대를 왜 아직도 바라는 걸까요. 한편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 게 도리어 살아가는 힘이라면, 그 힘이 제게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다보니 스스로 원망스러운 요즘이었네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신 레테 앞에서 간청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 내면의 어떤 우스운 희망사항들을 부디 지워달라고...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최대한 가려 달라고 말이죠. 이런 마음의 문제를 달고 사는 저는 제 자신에게, 혹은 제가 상처 줬던 누군가들에게는 유죄일까요. 아니면 이런 저라도 삶이라는 시간 안에서 각고의 노력이라는 걸 하는 이상, 무죄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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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만든 미궁 속에서... 헤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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