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던 8월은 지나갔고 어느새 9월이 시작되었어요. 그간 무탈히 잘 지내셨을 민님 이시길. 말씀하신 대로 시간은 정직해요. 때로 너무할 정도로 멈춤이 없죠. 잠시 생각해보니 인간이란 태어나서 끊임없이 얼마나 정직하게 늙어가던가 싶어요. 불멸의 신이 아니고서야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인데. 가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살려고 이리저리 아등바등 허우적 대다가 정작 무언가들은 놓치며 살기 일쑤는 아닐까 싶기도 해요. 내면의 소중한 무언가를 말이죠.
미궁에 빠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스스로 미궁을 빠져나올 궁리를 하고 있는 제가 보이는 최근이었어요. 오전에 2시간씩 꾸준히 운동을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잡다한 사념이 줄어들고 쉽게 우울감에 도취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해요. 조금 우습지만 비유하자면 마치 아리아드네의 실을 자가 발견한 기분이랄까요. 연신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흠뻑 흘린 이후의 찬 물 샤워 그리고 물 한잔을 목으로 넘기며 식탁 위에 앉아 노트북과 책을 펼 때. 바로 그 순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이라 이미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혀 버리고 말았네요. 잘 한 선택이기를...
민 님도 잘 아시는 아리아드네의 신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살아 나올 수 있도록 실을 건네준 지혜로운 그 여인은 사랑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렸으나 그에게 버림받고 지독한 아픔에 시달렸다죠.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구애를 받아들여 다시금 삶이라는 미궁으로 용감하게 뛰어들고 말아요. 비록 그 '삶'이라는 것이 술과 도취, 광기 어린 향락과 파괴적 본능, 극한의 고통과 죽음을 향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한들 말이죠. 그러고 보면 아리아드네도 일정 부분 자기애가 있는 여성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최소한 '다시' 사랑하려고 한 걸 보면. 그것이 당도한 새로운 삶이든, 자신으로 다가온 새로운 상대든, 아니면 실은 사랑에 실패했다 생각한 자기 자신이든.
읽으신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의 제목이 순간 아찔하게 다가왔던 건 왜였을까요. 사실 요즘 제 머릿속을 파고드는 궁극적 질문이 생겼기 때문일 텐데요. 부끄럽지만 생각하고 말거든요. '우리의 에로스는 종말 버튼이 눌러졌나'라고. 스스로 질문이 생겼으니 답을 찾으려는 저로서는 연이은 독서가 이어지는 요즘이기도 했고요. 물론 답은 없겠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보이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에 천착하는 중이며, 최근엔 알랭 드 보통이나 에스더 페렐의 성 심리학 관련 책들에 '초' 집중된 상태이기도 했었네요.
섹스는 정반대의 덕목들, 즉 자유로움 상상력 유희 통제력 상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통제와 자기 억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일단 욕망이 자연스레 발산되고 나면 야무지게 살림을 꾸린다거나 아이를 키우는 등의 가정생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당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섹스 편, p. 125 -
사랑이 얼마나 불시에 쳐들어올 수 있는지, 늘 놀라울 따름이다. 그 어떤 상황도 사랑을 예방할 수 없고 그 어떤 관습이나 약속도 사랑을 막아 내지 못한다.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생활 방식 속에서 개성을 통제하고 매일매일을 질서 있게 정돈하고 정해진 순서대로 행동할 때조차 충격적 이게도 예상치 못한 불꽃이 날아들고 만다. 그 불꽃은 서서히 타오르다 결국 진화할 수 없는 큰 불로 번진다. 에로스의 힘은 항상 동요를 일으킨다. - 에스더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
억누를수록 튀어나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 내면의 본능적 열망이라 해요. 억압하면 할수록 저항하고 싶은 마음은 더 강렬해지는 것처럼. 어쩌면 민님. 우리가 기혼자로 살아가면서 예전보다 조금 더 자신을 억누르며 살게 되기 쉬운 환경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요. 낭만적이며 몽환적이며 자유로운 자아를 품고 있다 한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현실적으로는 역할적 기능적 생활적 자아에 초집중되고 마니까요. 물론 밸런스를 맞춰서 산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쓸모 없다 말하는 어떤 자아들은 그렇게 내면에서 죽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안타깝게 놓인 건 아닐까 싶었어요.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왜 아니겠어요. 저희는 아들 둘을 기르는 '엄마' 이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발산할 수 있는 '사랑', '에로스' '에너지' '사유' '정념' '감정'과 같은 것들은 사적인 개인에게 온전히 집중되지 못할 수밖에요. 결혼 이후 가임기를 거쳐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비록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마주한 시간이라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일상이, 삶이, 어쩜 이렇게 '나' 에게 가혹하고 매정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저는 종종 자주 그랬거든요. 지금도 별반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요. 다만 태도와 마음가짐을 조금 뒤틀었을 뿐... 어쩌면 아무래도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게 바로 '결혼 이후의 시간' 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요.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였던 카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모든 신부는 결혼식 날 죽게 된다' 해요. (신화로 읽는 여성성, p.28) 다시 말하자면 결혼이 바로 장례라는 것인데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건 여성이라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결혼과 동시에 자기 내면의 다른 여성을 죽인다는 암묵적 사실을 간파했기에 그런 말을 했겠죠. '다른 여성'이라 함은 어떤 여성일까요. 모성 이전의 여자로 태어난 인간. 사적인 에로스를 말살시키지 않을 권리가 주어진 개인. 단지 타인을 향한 - 그것이 가족이더라도 - 이타적 사랑의 행위자로'만' 사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도' 있는 존재...
사랑의 가장 원초적 욕망의 뿌리는 결국 내 앞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것이 비록 나르시시즘의 파괴성을 지니다 할지언정. 처음엔 내가 아닌 '낯선' 사람, 즉 타자에게 자극을 받고 사랑을 나누게 되는 과정을 거치곤 하죠. 그리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의 어떤 희망사항이나 바람, 환상과 같은 것들을 내 앞의 상대에게 덧씌우기 쉽고. 그렇게 타자를 만나며 내 안의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 희열이 계속해서 사랑을 불타오르게 만들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어요. 익숙함이 타자성을 뛰어넘을 때. 처음의 에로스는 종말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기적 유전자라던 인간은 일종의 새로운 자극을 찾아 다시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으나. 사실 기혼자들에게 그 모험은 이미 '규칙 위반' 이자 '출입 금지' 아니겠어요? 에로스를 지녔다 한들 어떤 인간들의 욕망은 그렇게 미끄러지지만, 그 미끄러짐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더더욱 은밀하게 내면의 어떤 것들을 갈망하게 만드는 원형일 수도요. 아... 쓰고 나니 저도 정리가 안 되지만 하여튼 '인간' 은 복잡한 동물이자 이기적 유전자인 것만은 분명하지 싶습니다. (으으..)
지루하고 비극적이기 쉬운 일상을 견디는 방법으로 사실은 책 읽기 만한 최선의 선택이 사실은 없었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유자녀 기혼녀로서의 저에게는 책 이야말로 '집' 안에서 집 '밖'을 향하는 가장 소극적인 통로이자 자유를 쟁취하려는 적극적인 모험일 수밖에 없고 말아요. 어떤 순종을 집어치워 버린 채 '나'라는 독립적 자아를 얻게 되고 마는, 하물며 어떤 책들은 거대한 각성을 일으키게도 만들죠.
그리하여 저는 혼자 남겨진 잠깐의 시간 동안 에드 시런의 bad habit 이나 CAMO의 'Life is Wet' 을 흥얼거리며 자칫 속옷이 보이기 쉬운 핫팬츠와 헐렁한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방만해 보인다 한들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다 키보드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러다 이 문구를 떠올렸고요.
"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Mae West)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아무 데나 간다죠. 민님. 저는 이제 착한 여자는 집어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나쁜 여자가 될 거란 선언도 아니고요. 다만 이제는 살면서 내면의 또 다른 새로운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싶어요. 잘 지켜보며 되도록 지키고도 싶어 집니다. 천국 말고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담대한 용기를. '헤븐' 은 '어디든' 갈 수 있다며...
- 그곳이 만약 '바다' 라면, 책을 읽다 자꾸만 바다에 닿으려는 헤븐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