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잘 지내셨을까요. 요즘의 하늘은 그야말로 가을이라는 계절을 확실히 느끼게 만들곤 했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진도 찍어 보며 사실 민님 생각 자주 했어요. 하늘과 구름, 좋아하셨던 게 기억나서요. 그러면서 오늘은 편지를 꼭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정작 키보드 위에 손을 얹지 못한 채, 쓰기 대신 읽기를 택했던 저였어요. 그러다가 이제야 열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습니다. 사실 민님의 '잘못되어 봤자 얼마나 잘못되겠는가'라는 글을 몇 번 더 읽어 보며 마지막 문장을 내내 기억하게 되다 보니 글쓰기를 잠시 주저했던 저였을지도요. '글을 쓰는 우리는 더욱 용감해져야 한다'라고 하셨던 민님 덕분에 제 자신에게 묻곤 했거든요. '헤븐, 넌 지금 용감하니? 어디까지,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니...'라고.
글 앞에서만큼은 무엇보다 스스로 검열 없이 자유롭게. 솔직하고 투명하게 쓰고 싶었고 여전히 그런 마음이에요. 일단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이기적으로 써 보자는 식인데, 그것은 즉 타자라는 독자를 우선 배려하지 않고 일단 자유롭게 글을 쓰려는 심보를 은밀히 품고 있는 셈이죠. 그러려면 동시에 엄청난 용기와 모순을 이겨내야 하기도요. 타자에게 읽히기 위해 보이는 글과, 읽히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서 무작정 쓰는 글. 그 경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 도대체 좋은 '글' 이란 무엇일까 라는.... 답 없는 생각. 민도 글을 쓰다가 기어코 맞닥뜨려지는 그런 질문들. 분명 있으실 테죠. 저로서는 끝내 써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이기적인 사적 감정을 붙잡고 한 번에 써 내려가는 게 유독 습관이 되었는데요. 그 덕에 최근에 '결혼의 대가'라는 글을 쓰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또 스스로 묻곤 했었네요.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글은 쉼 없이 써지고 마는지. 그래야 이윽고 편안해지고 마는 건 왜 인지... '
'헤븐'이라는 필명이 궁금하신 민님께 뭔가 멋지고 그럴싸한 이유가 확실히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어쩌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큰 의미가 담겨서 시작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유독 지금 아쉽게 느껴집니다. 잠시 해명(?)을 하자면 '헤븐' 은 사실 십수 년을 다닌 저의 첫 직장에서의 첫 영어 이름이었어요. 신입사원이었던 제게 당시의 미국 법인장께서 지어 주셨죠. 일의 특성상 외국어 의사소통이 필수였고 영문 메일은 일상다반사였거든요.
아직도 떠올라요. 회식자리에서 제 이름의 원천(?)에 대해서 묻던 제게 그분이 해 주시던 말씀. '혜원이니까 헤븐. 네 이름과 닮지 않았냐' 고 했던. 앞으로 헤븐과 일하면 Heaven or Hell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Heaven으로 Hell을 경험해볼 정도로 뜨겁게 일 해보라던. 고작 이름 하나 새로 주어졌을 뿐이지만 저는 정말 인상 깊었어요. 그 이름'다운' 새로운 '자신'을 꿈꿨던 처음의 강렬함과 '일'을 대하는 무언가의 비장함마저 느꼈거든요. 나의 일, 그리고 새로운 이름. 바로 '헤븐'.... 실명만큼 '헤븐'을 사랑하려 했던 저로서는 자연스럽게 필명도 뭔가 '나'를 대표하는 건 '헤븐' 일 수밖에 없겠다 싶었죠. 엉뚱하지만 저로서는 자연스러웠던 흐름과도 같았던. 신의 존재를 믿지만 특별한 종교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무종교인 저는 필명으로 인해 가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지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아무튼 '헤븐'의 원천은 이러했답니다. :)
'헤븐'이라는 영단어는 '천국, 하늘나라, 낙원, 하늘'이라는 의미를 지녔다죠. '천국'이라는 단어로 인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까지 읽으신 민님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하게 마음이 뭉클해졌던 건 왜 였을까요.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짐작하게 만드는 '인간'의 이면성들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사는 이 세계가 진정 '나' 에게는 '천국' 이 될 수 있는지, 천국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를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여러 생각이 끊김 없이 마음에서 퐁퐁 솟구쳐 나왔기 때문일지도요. 친절한 책 해설과 더불어 말씀해주신 것처럼 소록도라는 섬에서 '탈출할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일지도 모른다는 시선에 지극히 공감했고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제게도 천국이라는 어떤 이상향적인 어딘가는 결국 '자유'라는 가치과 직결되기에.
조금 엉뚱할 수 있지만 저는 김혜진 소설가의 '9번의 일' 이 불현듯 비슷하게 떠올랐어요. '천국'을 떠올리다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건 어쩔 수 없이 '일'을 생각하게 되고 말았거든요. 인간과 삶, 그리고 일은 모두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니겠어요. 어떤 형태의 '일' 이든 대부분의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쉽지 않은 산업자본주의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되잖아요. '9번의 일' 은 일이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이었던 어느 노동자 가정의 이야기예요. 노동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생존에 은은한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도 그 '노동' 이 원치 않게 흘러가도 나오지 못하고 마는. 누군가에게는 '돈' 이 나오고 만들어지는 '일' 은 일단 뭐든 어떤 연유로 하게 되었든 할 수밖에 없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 누군가들의 이야기.
이봐요.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통신탑을 몇 개나 더 박아야 하는지, 백 개를 박는지, 천 개를 박는지, 그게 고주파인지 저주파인지 난 관심 없어요. 나는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가 시키면 합니다. 뭐든 해요. 그게 잘못됐습니까?
- 9번의 일, p.203-4 -
겉으로는 정말 '평범' 한 가정의 이야기. 누군가의 아버지, 직장 동료 그러면서 남편과 아내의 시선도 촘촘히 담겨 있는, 정말 잘 쓰인 소설이어서 몇 번 읽고 이렇게 현실감 있는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화폐경제가 출현하고 산업화와 기계화, 기술의 진보가 가속화될수록 묘하게도 우리 인간들은 은밀하고도 확실하게 어떤 '계급' 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아요. 다름을 인정한다고 겉으로야 말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손쉽게 스스로를 기만하며 타자들을 어떤 층위에서 배제하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싶고요. 사는 동네의 브랜드 아파트 여부와 평수로. 배우자 혹은 자신의 월급이나 직업 상 위치로. 자녀의 등수나 소위 성적 클래스. 내가 오늘 먹은 음식과 입고 있는 옷의 값어치로.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의식주를 결국 타자와의 '구별 짓기'를 은밀히 하려는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천국' 은 무엇일까요. 결국 오직 돈만이 나와 타인 그리고 나와 사물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물이 되고 마는.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진정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끊임없이 소비하게 되어 노동에서 떨어질 수 없게 만드는 대단한 우리들의 자본주의 '천국'.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 9번의 일, p. 113 -
민님 덕분에 '헤븐'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름이 내포하는 의미인 '천국'에 대해서 조금 깊숙하게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이라 한다면 현재의 저에게 정말 진실된 천국이란 바로 '자유' 로울 수 있는 무엇이네요. 움직일 수 있는 자유, 일할 수 있는 자유, 볼 수 있는 자유, 먹을 수 있는 자유, 죽을 수 있는 자유, 반면 일 하지 않을 자유, 만나지 않을 자유, 먹지 않을 자유, 말하지 않을 자유, 가만히 있을 자유, 혼자 있을 자유, 죽지 않을 자유, 기타 등등의 자유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다면 저는 아마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천국'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솔직히 이번 생에 반쯤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도 했고요. 왜냐하면 '부모' 이니까요. 사랑하며 살려는 '엄마'라서. 이해... 되실까요. 민님이시라면. 아마 고개 끄덕이셨으리라 감히 믿어 봅니다.
부모로 사는 사람들에겐 죽을 수 있는 자유는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럴 수 없는 셈이죠.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없는 삶. 누군가를 살피고 끝내 자신 그 이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삶. 때로 너무 사랑해서 아픈 삶. 죽어야 비로소 심신의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끝나는 모순적 삶. 따지고 보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게다가 '가정'이라는 집단 무리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란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 아닐까 싶고요. 아무튼 진정 자기 자신의 자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삶은 희극보다 비극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러다 보니 정말 천국 같은 삶은 거의 이 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싶은 거죠. 그래도 믿고 있어요. 가냘프게나마. 비록 비극에 가까운 이 시대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일 하고 또 일하며 누군가를 살피고 보살피다 자신을 살필 타이밍은 어긋나고 또 놓치고 말아서 기어코 눈물이 나려는 삶일지라도.
지금까지 내가 믿어왔던 사회적 기준이 답습된 삶과 사랑은 어쩌면 기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스스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깊이 사유할 것.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시절을 사랑할 용기를 지닌 자들이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저에게는 '천국'의 어딘가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스의 극작가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괴테 또한 칭찬을 마지않았던 소포클래스의 문장이 바로 우리가 정녕 놓치지 않아야 하는 삶의 커다란 가치를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고요.
"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헤븐' 에게 천국이란, 때때로 해방될 자유. 그리고 이 시절의 자신을, 내 앞의 사람들을 사랑할 용기.
결국 자유와 사랑. 그 두 개 없는 삶은 겉보기에는 천국이어도 결국 지옥이 아닐까 싶습니다.
- '바다'와 '가을의 밤공기'를 떠올리며, 결국 글로, 편지로 해방되고 마는 헤븐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