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기록
정음이가 악성뇌종양 수모세포종 환우가 된 이후 반년이 흘렀다. 수두증 및 종양제거술이라는 두 차례의 개두술, 그리고 후속 치료를 위해 전원을 한 이후 우리는 세 차례의 항암, 25회 차의 양성자 방사선 치료를 하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지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렀다.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 어쩌면 이렇게 세 계절 정도가 지나서야 나는 조금은 '제정신'을 차리고 시간의 흐름을 '자각' 한다. 최소한 글을 쓰고 있는 30여분의 시간 동안만큼은 멀쩡한 정신(?) 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곤 한다. 아니 여전히 제정신이라곤 말할 수 없을 테다.
켜켜이 쌓여가는 어떤 썩은 감정. 해소될 구멍을 찾지 못한 채 마냥 부패해져 만가는 마음. 그리하여 정신이 '말짱하다'는 형용사는 최소한 내게는 아직도 허락되지 못할 단어이겠다. 여전히 이틀에 한번 꼴로 우는 나날을 보내는 나라서. 물론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 부피와 밀도가 조금씩 완화되어 가는 것도 '나아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대성통곡에서 주르륵, 그러다 뚝뚝. 눈물의 양이 슬픔에 비례하는 결괏값이라면 그렇다. 눈물이 조금씩 말라가는 건 자명하다. 참는 시간도 제법 힘이 세졌다.... (라고는 하나 여전히 가끔 둑 터지듯 줄줄 흘러나오는 감정과 눈물은 어쩔 도리 없다)
소아암 환우와 엄마의 일상은 의외로 단출하다. 아이 둘을 기르는 여타 가정집의 전업주부의 삶과 조금은 닮아 있다. 다만 한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다면 매 순간 좀 더 치열하게 긴장하고 예측할 수 없는 앞일에 대비하듯 어깨에 힘을 뺄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는 것. 아니 어쩌면 다른 간병인 부모는 이렇지 않을지 모른다. 팔자소관이듯 '나'라는 인간의 '완벽주의' 성향은 나 자신을 좀 더 자학하듯 괴롭히는 데 일가견이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소아암 환우가 되어버린 너를 '확실히' 지켜야 한다는 것. 동시에 그런 환우를 쌍둥이 형제로 둔, 남겨진 첫째 아이의 일상도 무너지지 않도록 '제대로' 살필 것이라는 각오. 그러다 보니 24시간은 좀 더 피곤해진다. 건강한 초저학년 남아 둘 키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지만, 이젠 그중 휠체어생활을 하며 여전히 거동하기 힘든 암환우마저 간병하는 일은 글쎄.... 이 마음을 어떤 국어로 표현할 수 있지? 난 여전히 그 어떤 동사, 형용사, 부사, 단어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만다. 들끓는 어떤 감정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채로. 부유하는 감정을 그대로 꾹꾹 눌러 담은 채로.
열체크를 하고 정음의 대소변 상태를 관찰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전히 가출한 식욕은 돌아오지 못하지만 온세란정(항구토제) 반알씩 매일 의지하며 조금씩 먹는 섭식양을 늘려 나가는 중이다. 친정어머니의 감읍한 도움 덕에 최근엔 닭육수와 닭껍질을 많이 먹였다. 제법 잘 먹어주던 터라 하루 종일 푹 고은 토종닭을 내내 아이에게 먹였다. 그래서인지 최근 외래 피검사 결과 단백질 수치가 꽤나 높게 나왔다. 물론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 다시 떨어지는 백혈구와 ANC 수치로 인해 수치 주사는 피할 수 없었지만. 무엇이든 정음이가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그거 먹어 볼까'라는 말을 하자마자 재빨리 해당 음식들을 대령한다. 아이를 세끼 먹이고 중간중간 계속해서 간식을 먹이는 행위까지 부축이다 보면 어느새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 있다. 소아암 환우와 엄마의 일상은 생각해 보면 단순한 몇 가지로 압축되는 것 같기도 하다.
먹고 - 먹이기
싸고 - 치우기
자고 - 관찰하기
쉬고 - 준비하기 (다음 먹일 것, 다음 해야 할 일, 모든 '다음'의 연속들...)
물론 이 모든 행위의 근간엔 이것이 있을 테고.
치료하기 - 병원 오고 가기
환자 - 주 간병인
정음만 챙길 순 없는 노릇이라 친정어머니가 계시는 날을 타깃 삼아 최근엔 첫째 아이와 좀 더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그러고도 싶었다. 거의 반 년동안 첫째를 방치하다시피 했기에... 입원과 통원 외래를 다니는 시간 동안 정말이지 정음이만 돌봤기에. 늘 아픈 손가락 같은 첫째와 몇 가지의 외부 체험이나 교육을 신청해서 아이와의 시간을 보냈다. 직업 체험을 해 보기도 하고 둘이서 잠시동안 카페라는 공간에 가 있기도 했다. 아이와 사소한 일상 대화를 나누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포근해졌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모든 힘든 순간과 극명히 대비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 덕분이었을까. 첫째와 오고 다니는 동안 그제야 정말 가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음과도 되도록 산책을 자주 하려 애쓰는 요즘이다. 집과 병원만에 의지한 채 이 좋은 가을날을 만끽하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요양생활은 아이에게도 그리고 아이 곁의 나에게도 좋은 것 같지 않아서. 감사하게도 정음은 먼저 나가보겠다 했다. 첫째의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정음이는 정문 앞 너무 근처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 저 애들처럼 지금 못 걷잖아.
- 아니야! 우리도 치료 마치고 재활하다 보면 걸을 수 있어
-... 뛰고 놀고 싶은데 나는 지금 못하잖아. 보기 싫어. 여기서 기다릴래
정음이의 존재는 이제 내 눈물샘을 건드리는 유일한 원천이 되고 말았다. 아이의 문장 하나하나가 기특하면서도 대견할 때, 한편 속상해지고 마는 확실한 이유들이 존재하기에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오는 순간이 여전히 잦다. 그러나 나도 조금씩 훈련하고 있는 셈일지 모른다. 울고 싶을수록 큰 소리로 목성을 높이는 연습을 하면서. 입술을 꽉 물게 만드는 정음이의 문장 앞에서는 더 크게 웃으면서 말하는 연습을 한다....
- 그래 정음아! 우리 이제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살자. 학교 따위 가지 마. 안 가도 돼.
- 안가. 결혼도 안 해. 엄마랑 평생 같이 살 거야
- 물론이지! 엄마랑 평생 같이 살아.
- 엄마 죽으면 근데 나 누구랑 살아?
-..... 훈민이! 엄마가 집 두 채 다 해주고 죽을 거야! 그러니 먼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
여전히 나는 신을 원망한다. '어째서'라는 부사를 여전히 가슴 깊숙한 곳에 달고 사니까. 어째서 너인가. 어째서 나인가. 어째서 우리인가.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여전히 어리석은 나는 아주 가끔 이런 생각들에 휩싸여 나를 괴롭힌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열심히 일하고 모으고 너희들 키우느라 나는 후순위로 미뤄두고 살았는데. 그럼에도 지키고 싶어서 안간힘을 내서 낑낑 대던 내 모든 것들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커리어. 꿈. 운동. 책. 그리고 '나'라는 사람마저 이젠 지웠고 여전히 지우고 있다. 깔끔히 지워야 반대로 너희들을 더 잘 지킬 수 있기에. '저당' 잡혔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기에. '주어'를 말끔히 지워 버린 채 내 세계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너'가 되어버린다면 그 모든 억울함이나 속상함 조차 생략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주말은 좀 더 고민하는 시간이 잦다. 어떻게 하면 두 아이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즐거운 '가족'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그럼에도 생활전선은 생략될 수 없기에 세 끼니를 챙기고 중간중간 간식을 챙기고. 첫째 아이의 학습을 챙기고 정음의 대소변과 열체크, 클로르헥시딘과 니스타틴을 독려하고 가글과 좌욕, 히크만 방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포비드요오드스틱으로 소독 이후 테가덤을 붙이는 일상...... 두 아이에게 다른 집들 마냥 그럴싸한 가족여행이나 풍성한 나들이와 같은 시간의 기억은 아직 이 시절엔 충만하게 앉겨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말아 버리기 일쑤이지만. (수치가 낮을 땐 사실 외출도 조심스럽다.... 완벽주의 엄마 성향 탓이리라)
'언젠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언젠가 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려 분투한다. 분투의 끝은 생활과 맞닿아 그저 일상의 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거창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다. 다만 그곳엔 '우리'가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안다. 부재와 상실의 커다란 참혹함과 참담한 슬픔이 어떤 것인지. 그러니 다만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 자체만으로도 이젠 감읍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마누카 꿀을 넣어 갈아 만든 고구마 셰이크. 황태계란순두부찌개. 떡국. 요플레. 몇 가지 과일들. 오늘도 잘 먹어준 아이들..... 어쩌면 이제 내가 바라는 건,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내게 허락되는 유일한 욕심들은 아주 작고 소박한 것들에 불과할 테다...... 나의 바람은 이제 절대 클 수가 없기에. 남들의 아무렇지 않은 평범함이 나에게 너무나도 간절한 것들이 되어 버렸기에.
꾹꾹 마음과 눈물을 눌러 담아 어떤 단어와 문장들 안에 숨겨 놓는다... 정음과의 일상이 멈춤 없이 이어질 수 있기를, 이제는 신을 원망하지만 동시에 간청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뿐이라서. 이 유약한 인간이, 부디 잘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늘 의심하고 책망하면서. 휘청거리듯 꾸역꾸역 기어 나가는 일상일지라도. 일단 흘러 흘러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몇 차례의 남은 항암, 그리고 맞닥뜨릴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중간에 큰 이벤트 없이 네가 무탈하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