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의 한국 나들이

꿈이었나..?

by 늦봄

한국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미취학 아이들 둘을 데리고, 직항도 아니고, transit까지 해가면서 한국을 다녀와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비자 때문이었다.


폴란드 주재원으로 나올 때, 비자를 한국에서 받아온 것이 아니라, 폴란드 입국 후 거주증을 신청해서 거주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 폴란드에 한국인은 무비자로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유럽 간 국경을 넘는 게 더 까다로워졌는데, 우리 가족은 폴란드 입국기록과 거주증 신청 기록만 있었기에, 주변국으로 출장이 잦은 남편은 비자가 필요했고, 폴란드 정부에서도 거주증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에게 유예기간을 줌에 따라 그 유예기간 기한을 맞춰서 한국으로 비자를 받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출국하기 전, 주한 폴란드대사관에 비자신청 예약을 잡고, 한국에서 처리해야 일들을 쭉 나열했다. 거의 병원방문 계획.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번에 우리 가족이 한국에 다녀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한 달 동안 우리 가족은 병원을 제집들 나듯이 해야 했다.


만 5세 첫째는 충치치료를 5개나 해야 했다. 윗니와 아랫니 두 군데에나 구멍이 나있는 상태여서 4군데에는 레진을 한 군데에는 크라운을 씌웠다. 한 달 동안 치과 4번 방문 기록을 세웠다. 남편도 비슷한 숫자의 충치치료를 하고, 평소에 추적관찰 중이던 몇 개의 건강문제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이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대로 방치했다면 얼마나 큰일이었을까...


언어가 통하는 내 나라에서 있는 것이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전화 한 번이면 병원예약이 바로 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다. 나는 국가건강검진 시기를 놓쳤는데, 전화 한 통만 하니 바로 다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하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한 달만 한국에 들어가 있던 것이라서 숙소를 계속 옮겨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원래 살던 지역에만 있지 않고, 남편 고향에도 갔다가, 제주도에도 갔다가. 기차, 국내선 비행기, 지하철과 같은 한국 대중교통을 모두 골고루 이용했다. 덕분에 짐도 계속 쌌다가 풀었다가 해야 했고, 아이들도 시차적응도 힘든데 잠자리가 계속 바뀌니 밤잠을 설첬다.


아이들은 한 달 동안 양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쑥쑥 커서 돌아왔다. 항상 엄마, 아빠만 함께하는 핵가족 형태로만 살다가, 사촌도 만나고, 삼촌들도 만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만나고. 가족들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가방 한가득 로봇까지 가득 사서 돌아왔다.


폴란드로 돌아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door to door로 24시간이 꼬박 걸렸다. 하필이면 transit까지 해야 하는데 폭설로 비행기가 연착에 또 연착을 하는 바람에 두 꼬맹이들이 아주 호되게 고생을 했다. 나는 비행기 타기 전에 감기에 걸려서 비행기 타고 오면서 거의 사경을 헤매었다. 정말 이제 죽는구나 싶으니까 다 왔더라.


폴란드 돌아와서 컨디션 회복과 시차적응에 1주일이 걸렸다. 아이들도 감기기운이 있어서 돌아온 후 며칠간은 열도 나고, 몸살에 시달렸다. 그래도 다행히 어려서인지, 한국에서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서인지 하루이틀 만에 회복을 해서 다행이었다.


짐을 많이 가져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겨울옷들이 부피가 커서 짐 5개에 다 못 들어간 것은 친정부모님이 선편으로 보내주시기로 했다. 다이소만 가도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아 보였는데, 짐을 싸다 보니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야 했다.


해외에 사는 사람들이 한국에 한번 다녀오면 천만 원은 기본으로 든다는 말이 있던데,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용적으로, 체력적으로, 한국 한번 다녀오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한번 다녀올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한국에서 받아온 가족들의 사랑과, 냉장고에 가득 찬 한국음식, 그리고 한국 물건들의 힘을 받아, 우리는 다시 폴란드 생활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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