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한 구석, 동물들의 이야기
벤치에 앉으면 종아리 사이를 오가던 길고양이가 있었다. 주민들이 마련해 둔 집에서 추운 계절을 버티는가 싶더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몇 주가 지났다. 자동차 밑에 숨은 노란 고양이를 보며, 오늘도 발길을 피해 숨죽이며 살아갈 작은 것들을 생각한다. 거리로 내몰릴 개들과, 주택가를 돌아 사는 곳을 옮길 동물들을 떠올린다. 도시의 한 구석, 오늘도 차가운 담벼락 아래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의 자리가 넓어지면 조용히 그 자리를 내어주는 이들이 있다.
거의 매끼 동물을 먹는다. 일주일에 한 번 그들의 생활을 엿보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해마다 동물원에 간다. 골목길 고양이의 눈빛과 옆집 개의 울음소리를 매일 밤 마주친다. 삭막한 도시의 하루. 동물은 그대를 위로해주는 친구이자, 밤을 근사하게 하는 음식이고, 눈을 사로잡는 즐거움이 된다. 당신은 불편하지 않은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다양한 시선이.
이 작은 생명들에게도 도시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쓰고 싶었다. 고민하고, 공부할수록 그 끝에는 흐릿하고 막막한 결론만이 있었다. 결국 권리는 사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이라는 말 역시 사람의 이익 위에 지어질 개념이다. 그래서 법과 실익의 문제를 떠나, 도시 곳곳에서 만난 동물들의 눈빛을 기록하기로 했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들의 눈에 담긴 욕구와 표현, 고통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도시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다
런던의 거리나 공원을 걷다보면 처음 보는 동물을 자주 만난다. 얼마나 많은 종의 동물들이 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사람과 동물 사이에 지켜지고 있는 적당한 거리에 관심이 갔다. 하루 이틀의 여행자라면 다 거닐지도 못할 넓은 공원이 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시의 여백을 채우는 녹지는 도시인들의 고민이 내려앉는 사람의 공간이라 여겼으나, 건물이 빼곡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도 공원은 쉼터가 되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 다람쥐가 낙엽 위를 뛰어 다녔다. 백조와 오리, 철새들이 호수에 드리운 나무 뒤에 숨어 휴식을 취했다.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을 길이 없는 시대,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도시에도 공백이 필요하다. 희귀한 동물을 케이지에 가두고 사육하는 일 외에도,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있다. 도시의 어느 면은 사람의 장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려면 그들만의 면적이 필요하다. 애초에 이 자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
지붕 아래, 건물 아래의 작은 틈, 물이 오가는 파이프와 마당의 작은 나무 – 우리가 세우고, 가꾼 인공물에 다른 생물이 자리하면 우리는 대개 이상하거나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남은 음식물 근처로 몰려드는 동물은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사냥과 학대의 일부는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다. 결국 도시의 주인은 사람이니까.
도시라는 이름으로 숲과 산을 다듬은 우리에겐 나름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 책임은 이 공간이 우리의 것만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시의 한 면은 언제나 우리가 아닌 다른 생물들의 차지다. 먹이를 챙겨주고, 쓰다듬어야만 동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물러서고, 그들의 자리를 조금씩 넓히는 노력은 공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바다가 그리운 돌고래, 북극을 모르는 북극곰
2018년 10월 17일,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북극곰 ‘통키’가 동물원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물원 안에서 태어나, 23년의 시간을 버티고, 우리 안에서 마감하는 생은 어떠한 삶일까. 우리나라의 여름을 견디는 북극곰과 겨울을 버텨낸 코끼리의 시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동물의 복지를 위해 사육사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본의 나고야 항 수족관에선 돌고래를 훈련시키고 쇼를 통해 묘기를 선보인다. 많은 가족이 수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유리를 두드리며 돌고래와 교감을 시도했다. 손을 짚고 눈을 마주치면 그들과의 소통에 성공한 기분이 든다. 바다처럼 푸른 수조 안에서 그들은 마음껏 헤엄치고 정해진 시간에 살아있는 먹이를 받는다. 사육사가 붙인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은 환호했다. 대부분의 동물원과 수족관에는 이런 교육적 목표가 있다. 동물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키우고,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습성을 익히는 것이다.
수족관의 설명대로 돌고래는 사육사의 말을 잘 따르는 듯했다. 신호에 맞춰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돌고래가 지적 존재임을 실감한다. 동시에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잠시 고개를 돌린다. 사람의 말을 이해해도 자신이 갇혀 있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시속 50km로 헤엄을 치는 그들에게도 수조가 바다와 비슷한 환경이 되리라 생각하기로 한다. 생태 설명회를 통해 돌고래는 초음파로 소통함을 배우되, 끝없이 초음파를 튕겨내는 유리벽 너머 그들을 본다.
도시의 사람들에게 동물원과 수족관은 소중한 시간들을 허락한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거리에선 볼 수 없는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바다나 사막, 초원으로 떠나지 않아도 동물들과 교감하고 더 자세히 알게 될 기회를 얻는다. 멸종 위기종이 사육사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로 인해 생태계가 조금 더 나아질 것만 같다. 우리 안의 동물과 마주한 아이들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길 소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동물들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사실들을 배웠다. 일부 동물은 포획 당시의 상황을 기억한다. 죽임 당한 가족을 떠올린다. 바다를 그리워한다. 외로움을 느끼고 사람들의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동물을 아끼는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면, 진정한 교육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북극을 모르는 북극곰, 바다를 그리워하는 돌고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위기에 처한 생명은 동물원 안에만 있지 않다. 도시에 밀려나는 동물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가까운 노력을 보탤 때, 수조의 유리벽과 사육장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
이번 겨울에도 거리의 동물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스팔트 위의 추위에, 도로 위의 사고로, 혹은 굶주림으로 조용히 사라진 동물들이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도시의 환경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시작엔 그들을 길들인 손이 있다. 유기동물의 수는 해마다 늘고,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만 10만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유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기동물 중 절반 정도는 다시 입양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일부는 거리에서 얻은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숨을 멈추고, 일부는 안락사의 대상이 된다. 몇몇 동물구조단체들은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많은 동물들의 안락사를 막고자 입양을 돕는다. 오랜만에 기관을 찾으면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 다행히 입양이 되었거나, 혹은 결국 보호 기관 내에서 세상을 떠난 경우다. 대개 나는 일부러 그 빈자리에 대해 묻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온 동물과 반려동물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우리가 도시로 데려와 집에서 길들인 동물은 다시 자연에서 살아갈 습성들을 잊는다. 어떤 종은 사람들의 개입으로 자연에서 살아갈 능력을 잃은 채 태어난다. 거리의 동물에게 혐오의 시선을 던질 때, 우리는 그 시작에 사람이 있었음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담벼락 아래 키우던 동물을 놓고 돌아설 때, 그는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고 길을 나선 어느 겨울 밤. 어시장 앞 전봇대 아래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상자에서 나온 포장용 끈은 전봇대에 묶여있다. 사료와 물이 담긴 종이컵 두 개. 상자 안의 어린 고양이는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