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산을 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by 컴쟁이

유산을 했다. 정확한 명칭은 계류 유산이라고 한다. 임신 초기에 이런 일이 많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 발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없이 오만했다.


사실 임신을 하고 나서 조금 무서웠다. 아직도 나는 갈팡질팡 세상 앞에서 가끔은 무너지고 감사가 부족한 한없이 건방진 사람인데 내가 작은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 성인까지의 성장 과정을 든든하게 지켜봐 줄 수 있을까 혹여나 내가 그 아이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이왕 생긴 축복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잘 키워 보자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근데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청 슬프진 않았다. 근데 눈물이 나더라 알게 된 첫날에는 그냥 눈물이 났다. 이상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슬프구나 나 마음이 아프구나 나 속상하구나 나 힘들구나 하루를 온전히 애도했다 설 연휴 기간에 알게 되어서 그런지 마음 정리 할 시간은 충분했다.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찾아오지 않은 건가 나에게 문제가 있나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근데 나는 문제가 없다. 준비는 영원히 되지 않는다. 그냥 나의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대부분의 계류 유산의 원인은 염색체 이상이라고 했다. 어딘가 아프고 유전자적으로 잘못된 아이들이 뱃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엄마의 잘못은 없다. 진짜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임신 기간에 무리하지 않았다. 밥 잘 챙겨 먹고 잠 잘 자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강하기 때문에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계류유산은 발생할 수 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계류 유산을 겪은 사람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엄마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준 모처럼의 시간을 몸과 마음에 쉼을 주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라. 회사에서 주는 법적 유산휴가, 만일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면 주변 분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쉬는 시간을 확보해라.


아이가 생기고 몸과 마음이 바쁘지 않았는가? 아이를 낳은 뒤의 미래를 그려 보느라고 불안하고 조급하진 않았는가? 나는 그랬다. 쉬어도 된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수능 끝난 고삼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쉬어도 된다. 고생했다. 정말 고생 많았다. 난 이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