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을 잡고
어떤 약속은 참 신기하다.
그 약속이 없었다면 분명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주가 딱 그랬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고, 감기 기운이 살짝 올라오며 콧물이 훌쩍거렸다. 몸도 마음도 동시에 웅크려버린 한 주였다. ‘아무 데도 나가지 말자, 이번 주는 그냥 집에서 푹 쉬자’는 결심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이나 외출을 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약속, 장소와의 약속,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
그 모든 약속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한때는 이런 약속이 부담이었다. ‘괜히 잡았나, 그냥 취소할까’ 같은 생각을 하며 출발하기 전까지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런데 막상 나가서 걷다 보면, 공기가 달랐다. 생각보다 바람이 부드럽고, 카페 유리창에 닿는 빛이 좋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아, 괜히 나왔지만 잘 나왔다.
요즘 들어 그런 순간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집 안에 있으면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온 것처럼 느껴진다. 스마트폰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영상을 보고,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심심하면 쇼핑도 한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채 세상을 구경하는 일은 너무나 편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함이 오래가면 어느 순간 공허함이 찾아온다.
커피를 마시고, 과자를 아그작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
그 속에서 잠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는 건 좋다.
하지만 오래 머무르면 마음이 흐릿해진다. 사람의 체온, 거리의 냄새, 공원의 바람 같은 것들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 나를 현실로 이끄는 건 언제나 ‘약속’이었다.
과거의 내가 잡아둔 크고 작은 약속들.
그 약속들이 지금의 나를 밖으로 끌어내고, 살아있음을 다시 느끼게 만든다.
가령, 친구와 “이번 주엔 꼭 보자” 하고 건넨 짧은 메시지 하나.
별생각 없이 눌렀던 ‘좋아요’ 이후 이어진 “그 카페 진짜 가볼래?”라는 대화.
심지어는 나 혼자 세운 약속도 있다. “이번 주엔 꼭 걸어야지.” “요즘 너무 앉아만 있었으니까 하루는 운동하자.”
그런 사소한 다짐들이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생각보다 다정하다.
찬 바람은 살짝 매섭지만, 그 속에 가을 냄새가 있다.
길가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고, 공원 벤치에는 얇은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있다.
그 풍경 속에서 걷다 보면, ‘아, 이래서 약속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약속은 때로는 의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일상의 활력소다.
나를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힘, 게으름을 이기는 핑계, 그리고 삶을 다시 살아있게 만드는 스위치 같은 것.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아니었으면 나도 오늘 집에서 넷플릭스만 봤을 거야.”
그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움직이게 만든 하루. 그게 약속의 힘 아닐까.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차가워지는 시기엔 더욱 그렇다.
점점 더 게을러지고 싶은 계절,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싶은 계절.
그럴수록 작은 약속 하나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약속은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일정이 아니라, ‘내가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나는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이 걷고 싶다.
카페 앞에서 커피를 손에 쥐고, 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느끼고 싶다.
그런 순간들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작은 약속 하나를 잡아본다.
더 추워지기 전에, 걷기 좋은 요즘의 날씨를 마구마구 즐기기 위해서.
언젠가 이 계절이 끝나고 나면, “그때 참 잘 걸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결국 나를 세상으로 끌어내는 건 언제나 그런 사소한 약속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