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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3. 체스

- 이제 남편의 월급으로만 살아야 했다



이제 남편의 월급으로만 살아야 했다. 그건 카드 할부 대신 뒷자리가 9천 원 단위로 떨어지는 옷을 사고, 서점 대신 도서관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편 몰래 시댁이나 친정에 용돈을 드릴 수 없게 되자, 명절에 모이는 것이 점점 즐겁지 않았다. 전업맘이 된다는 것은 각종 이웃집 정보에도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 영. 수 같은 필수 사교육부터 피아노, 축구, 생태 따위 선택 사교육까지. 이웃집 사교육의 질과 가짓수는 그대로 그 집안의 경제력을 드러냈다.


큰 아이 8세 때 처음으로 사교육을 시작했다. 레고 조각을 매뉴얼대로 만들고 나서 다시 부수어 자기만의 레고를 만들기 시작한 아이를 보고 가까운 레고 센터를 찾았던 거다. 홍보 책자에 의하면 그곳은 레고 모형에 동력 장치를 달아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여 작동하게 하는, 소위 미래의 로봇 공학자들을 길러내는 산실이었다. 어느 정도 기초 과정을 익힌 아이들은 매해 전국 대회에 팀으로 출전해 서로의 기량을 견주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이렇게 취미가 곧 기량이 되고 팀웤을 배우는 문화 같은 것에 내가 소위 로망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두어 해쯤 뒤, 그 학원에서 두뇌 계발의 일환으로 ‘체스 과정’을 신설했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지갑을 열었다.  


문제는 방학을 이용해 잠시 체스의 기초만 익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체스 과정의 판이 커져버리면서 시작됐다. 학부모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은 체코치가 어느 날 그해 체코에서 열리는 오픈 대회에 아이들을 데리고 출전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당연히 입상은 목적이 아니었다. 세상엔 그런 세계도 있다는 걸 우리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경험하면 얼마나 좋겠냐며, 공부 아닌 무언가가 너무 좋아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겨루기도 한다는 걸, 근데 하필 그게 두뇌 계발도 되는 오래전부터 검증이 된 어떤 것이니 얼마나 좋으냐며.


나는 마치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어학연수도 유학도 특별한 일이었던 우리 세대와 우리 아이들의 세계는 분명 달랐다. 당시 과열된 대한민국 교육에 적잖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게 국영수처럼 점수로 바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이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과녁을 비껴가는 듯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방식. 적어도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국영수를 향해 일렬로 달려가는 방식이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돈을 써야 한다면, 내 아이에게는 특별한 경험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계획과 비용에 대해 남편과 시댁과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웬 돈지랄?’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얼마나 나이브했던가. 남편은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학원도, 과외도, 어머니의 잔소리 한마디 없이 알아서 공부 잘하는 사람이었다. 시댁은 학교 공부 외에 돈을 들이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교육 없이 아이 키우기 선봉장쯤 되던 친구는 이게 시작이라고 했다. 다들 첫째 때나 멋모르고 해 보는 돈 낭비라고, 이제 시작하면 점점 가짓수가 늘 거라고도 했다. 학원이란 게 다 그렇게 엄마들의 불안으로 장사하는 곳이라고 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서 시댁은 남편이 대학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했으며, 친구는 학원에 아이를 안 보내는 대신 집안 책장 가득 빽빽하게 책을 사들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욕망은 고작 쓸데없는 돈지랄이라니.


내 쓰임을 제한하는 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하지만 아이 밑에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내 안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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